아무것도 아닌 날들 by 니체보 열 두 시가 되면서 주택가 불빛이 모두 잦아들기 시작했다. 늦게까지 불을 켜고 공부하고 있으니 안 쑤신 곳이 없었다. 나는 기지개를 켜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나의 방 아래로 꽤 넓은 통행로가 내려다보였다. 새아버지와 어머니는 아래층에서 조용히 잠들었고, 이복 여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것이 조용하고 안락했다. 한적한 동네에서도 종종 살인사건이 나고는 하는데 부동산 업자는 그런 일은 이곳에선 드물다고 했다. 그러나 타인의 개죽음은 지역뉴스 모퉁이에 여러 개중의 하나를 장식할 뿐이므로 비밀스런 사건들이 얼마나 많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방 안의 공기가 지나치게 텁텁하여 창문을 반쯤 열었다. 유럽식으로 위로 밀어올리게 되어있는 창을 여는데, 불쑥 고함소리가 들렸다. 통행로를 한 사람이 질주하고 있었다. 도망치는 그의 뒤를 따라 대 여섯 명의 사람들이 욕설을 뱉으며 쫓아가고 있었다. 업자의 말은 거짓말이었다. 나는 더 알려 하지 않고 창문을 닫았다. 턱 소리와 함께 창이 닫히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무엇이든 수험 공부 외엔 알게 되길 원하지 않았다. 공부만으로도 머리가 복잡했다. 책상에 앉으니 다시 죽음처럼 조용해졌다. 라디오를 켰다. 정적이 전과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네가 심은혁 맞지?” 험악하게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녀석 하나가 말을 걸어왔다. 이름표를 보고야 그가 김중규라는 것을 알았다. 그도 나의 이름이 달려 있는 가슴께를 노려보고 있었다. 왜 노려보는 걸까. 표정이 좋지 않았다. “담임이 찾아.” “.....?” “담임이 찾는다구, 전학생.” 담임의 호출이라니, 또 촌지를 갖고 오란 얘긴가? 교실 왼편 가장 첫 줄이 나의 자리였다. 짝도 없었다. 전학 온 첫날부터 학교 분위기가 전에 있던 학교와 다르다는 것을 알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친구 할만한 사람이 없으면 친구 같은 것은 없어도 괜찮다, 전학 와서 겪게 마련인 텃세에도 나는 무심했다. 그렇게 별 탈 없이 (교류도 없이) 삼 개월이 흘렀다. 나는 책을 덮고 교실을 빠져나갔다. 그러나 담임은 교무실 자리에 없었다. 못된 장난이거나 실없는 소리였으리라 치부하고 교실로 돌아왔다. 돌아와서 마주한 교실은 눈을 의심하게 했다. 방문하는 이 하나 없던 자신의 썰렁한 자리는 덩치들에 의해 점령당해 있고 책과 가방이 난잡하게 늘어져 있었다. 흰 하드커버 속의 책장이 파라락 넘어갔다. 미친 듯이 책을 흔들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그들은 나의 가방을 뒤집어 탈탈 털었다. 물건들이 시멘트 바닥 아래로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곤두박칠쳤다. 모두의 시선이 쏠렸으나 개의치 않았다. “아, 새끼 왜 이렇게 못 찾아.” 건너편에 앉아있던 다른 놈이 일어섰다.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위압적이다. 그는 시멘트 바닥에 떨어진 내 물건들을 지근지근 밟으며 책상 서랍까지 뒤집었다. 멀찍이 다리를 꼬고 있는 감시자로 보이는 놈은 그들을 관조하고 있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그들이 찾고 있는 것이 오전에 가슴 큰 여자애가 갑자기 던지고 간 러브레터가 아닌가 생각했다. 낯모르는 여자가 냄새 나는 남자 녀석들의 교실로 찾아 와 곧장 책상 앞에 붙어서서 읽고 있던 책 사이에 편지를 끼워주었다. 순간 내 주변에 있던 놈들의 들이 표정에 쫘악 금이 간 것이 느껴졌다. 대다수가 너, 사람을 잘못 본거 아니야. 널 좋아하는 잘생긴 난 여기 있다구! 라고 소리치고 있는 듯 했다. “분명히 여기 넣었는데. 씨발. 없어. 딴 데 숨겼나봐.” 나에게 그간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들에겐 그들의 세계가 있었고 후발 주자가 끼어들 틈 따위는 없어 보였다. 덩치들은 내가 바닥에 떨어진 것들을 주워 그들을 밀치고 자리에 앉자 벙 찐 얼굴을 했다. 질문이라도 한마디 하면 분위기가 좀 누그러질 것임을 알면서도 나는 그들을 깨끗이 무시했다. “장유미가 주고 간 편지 어딨어?” 교실 공기가 딱딱하게 굳어갔다. 구경하던 녀석들도 눈을 거뒀다. “이거 말하는 거야?” 정적과 팽창한 긴장감. 나는 가슴 안 주머니에서 반으로 접힌 편지를 주한 앞에 내밀었다. 푸른 편지봉투가 구겨져 있었다. “장유미가 준 편지를 구기다니!” “거기다 숨긴 거냐?” “그냥 넣어둔 것뿐이야. 가질래?” 상대가 받지 않아 다시 넣으려고 했다. 그가 내 손목을 잡아 비틀었다. 순간적 아픔에 입술을 깨물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씨발 새끼가 누굴 엿으로 알어. 가질래?” 그가 주먹을 뻗어 얼굴을 후려쳤다. 갑작스런 충격에 왼쪽 눈이 한 동안 보이지 않았다. 그는 편지를 빼앗아 감시자에게 건네주었다. 나는 남은 오른쪽 눈으로 한편에 선 감시자가 서늘한 눈매로 그 안에 적힌 것들을 필사적으로 읽어내려 가는 것을 보았다. 중학생들 같아. 속으로 뇌까리며 그들이 어서 사라져 주길 바랬다. 주먹은 강펀치였다. 책의 글씨가 잘 보이지 않았다. 편지 내용은 별것도 없었다. 저렇게 필사적으로 읽을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다 읽자 감시자는 편지를 여덟 조각으로 잘게 찢어 창 밖으로 던졌다. 우락부락한 놈이 나를 붙잡아 교실 밖으로 끌고나가려는 찰나 수업을 시작하는 종이 울렸다. 과학 선생이 들어오면서 모두 개미새끼들처럼 흩어져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화장실에서 보니 얼굴 한 부분이 붉어져 있었다. 떼를 지어 몰려다니는 놈들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렇게 피해가 올 줄 몰랐다. 할 수 있다면 그들이 만진 책과 가방을 모두 물에 씻고 싶었다. 태도가 야만적이고 불결했다. 새아버지만 아니었다면 죄다 새로 샀을 것이다. 어머니가 그 남자와 재혼한 후 돈 쓰는 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나는 얼굴을 씻었다. 수돗물에서 비릿한 냄새가 났다. 입을 헹구고 몸을 일으키는데 불쑥 손수건이 내밀어 졌다. 아침에 본 그녀였다. 자신과 키가 비슷해 보일 정도로 꽤나 장신인 유미를 보고 나는 멈칫했다. “답은 언제 받을 수 있어? 언제줄꺼니?” 남자 화장실까지 들어오다니, 정말 대책 없군. 장유미는 수건으로 직접 내 얼굴을 닦아주었다. 이쪽도 그놈들과 마찬가지로 야만적이다. 나는 화장실을 빠져나갔다. 유미와 일행들은 줄에 꿰인 것처럼 뒤따라왔다. 전학 오기 전에도 여자들에게 몇 번 대쉬를 받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방식은 모두 수줍고 소극적이었다. 거절하면서도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치근덕거리면서 자신에게 따라붙는 그녀에게 나는 일말의 애정도 미안함도 느낄 수 없었다. 치한과 무엇이 다른가. 교문까지 다다랐을 때 멀찍이 교실에 소란을 일으켰던 패거리가 서있는 것이 보였다. 젠장. 나는 몸을 돌렸다. 두 눈을 빛내면서 장유미가 얼굴을 가까이했다. 확실히 부정할 수 없는 미형이다. 엉덩이를 덮는 검은 생머리에 흰 피부, 붉은 입술, 육감적이고 풍만한 가슴, 교복 아래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만큼 가슴이 풍만했다. 그래비어인가 그라비아인가하는 모델들을 닮았구나. 살랑대며 웃고 있는 그라비아의 모습, 교문 앞에 서있는 그들이 왜 그토록 광분했는가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으나 나는 ‘거절’ 이외에는 떠오르는 단어가 없었다. 어머니를 외하고 여자의 입술을 이렇게 가까이서 본 적은 없었다. 말을 할 때마다 흰 치아가 붉은 입술 사이로 살짝 보였다. “답 지금 줄게. 난 너한테 관심없어.” 노골적으로 실망한 여자를 두고 교문을 통과하는데 따가운 시선을 느꼈다. 욕설이 목덜미에 달라붙었다. 공부해야 할 것을 가늠하면서 버스에 올라 차창에 머리를 기댔다. 무심하게 지나가는 풍경들, 장유미는 자신에게 마음의 떨림은 느꼈다고 했다. 대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버스에서 내려 서점에서 나는 수중에 있는 돈을 빠르게 가늠했다. 사야할 참고서가 다섯 권이었다. 돈이 부족해서 네 권밖에 사지 못했다. 서점을 나와 골목 귀퉁이를 도는데 누군가가 목덜미를 잡아 골목으로 다시 끌고 들어갔다. 그들이었다. 오랜시간 기다려온 희생물을 보는 듯한 눈으로 포획자들이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 새끼 완전 내숭이네. 좆나 받을 거 다 받아 챙겨 먹으면서 내색 한 번 안 하잖아. 조용히 찌그러져 있는 줄 알았더니만 반반한 얼굴로 여자애들 좀 홀린 모양이지?” 나는 고개를 숙인 채로 그들의 가슴팍에 달린 이름을 하나씩 읽었다. 김중규 정상호 김수영... 뒤이어 비웃는 소리가 있을 줄 알았건만 반반한 얼굴에 이의를 다는 놈은 없었다. 뭐가 잘생겼냐, 뭉개다 만 얼굴이다 라는 반응이 나오리라 예상했는데... 손가락 하나로 김중규가 턱을 치켜들었다. 목이 뒤로 꺾어졌다. “확 긁어버리고 싶네. 시팔. 주한아. 너 유미랑 아직도냐?” 정상호의 질문에 감시자가 미세하게 인상을 썼다. “이 새낀 곧 할 거 같다. 장유미 하는 짓을 볼 때 너보다 빨리할 거 같다구. 생긴 것도 기집년들이 좋아하는 취향 아니냐?” “말이 좀 거칠다. 정상호. 기집년이라니 .” 김수영의 말에 정상호가 눈을 부라렸다. 건드리면 폭발하는 폭탄인 모양이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수영은 한 발 물러나 감시자의 곁으로 섰다. “뭘 산 거야? 딸치기용 잡지냐?” 휙 쇼핑백을 빼앗아 갔다. “넌 이딴 거 보면서 딸치냐?” “저 새낀 그럴 거 같은데. 함 시켜봐?” 왜 이런 얘길 듣고 있어야 하는지도 의문이었다. 그렇다고 참고서를 두고갈 수도 없었다. 전 재산 턴 건데 빨리 돈이라도 뜯고 보내줬음하는 마음이었다. 어차피 털릴 돈도 없으니까. “너 아까 장유미랑 키스했지. 씨발아.” “...아니. 너희가 잘못 본거야. 나는 김중규를 쳐다보았다. “무서워해야 빨리 끝난다.” 나직하게 울리는 김수영의 목소리는 나의 태도를 비웃는듯 했다. 이런 녀석들에게 정면으로 맞서면 죽거나 허리가 부러져 버릴 것이다. “죽거나 미치기엔 아까운 얼굴이잖아. 안 그래?” 동의를 구하듯 김수영이 담배를 피워물며 희죽 웃었다. 감시자는 한 마디도 없었다. 나는 정상호의 손에 쥐어져 있는 쇼핑백을 재빨리 빼앗아 들었다. 그리고 주머니에 구겨져 있던 천 원짜리를 꺼내 그의 얼굴에 던지고 뛰었다. 왜인지 놈들은 따라오지 않았다. 등 뒤에서 고함이 울렸지만 따라오지는 않았다. 어제 산 참고서가 모조리 없어진 것을 안 것은 수업이 시작되고 난 직후였다. 집에선 일체 가방을 열지 않기 때문에 두고왔을 리는 없었다. 지퍼가 뜯어져 있었다. 선생으로부터 전학 온 지 삼 개월이나 되었는데도 분위기 파악을 못 한다면서 면박을 당한 뒤 교실 밖으로 쫓겨났다. 밖으로 나가면서 등 뒤로 낄낄대는 소리가 들렸다. 초등학교로 전학 온 것은 아닌가. 책 감추기라니, 수준 이하였다. “다음에 또 안 갖고 오면 그땐 운동장 백 바퀴야.” 수학 선생은 막대기로 어깨를 툭 치곤 복도를 가로질러 사라졌다. 복도에 서서 나는 창밖을 보았다. 흐린 하늘과 운동장이 한 눈에 내려다보였다. 창이 유난히 컸다.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 나는 교실로 돌아가 가방에 한 권 남은 책을 쳐다보았다. 글씨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쉬는 시간 분주하게 돌아가는 교실 안에서 나는 지난 세 달과 오늘 하루가 비교되지 않는 것을 깨달았다. 무리들이 앉아있는 쪽을 보았다. 감시자는 자리에 없고 김중규와 정상호가 자신의 책이 분명한 것을 칼로 죽죽 긋고 있었다. 문어 다리처럼 종이가 잘게 일어났다. 끌끌 웃으며 딱하다는 듯이 그들은 웃었다. 이것으로 끝이라면 굳이 가서 찾아올 생각은 없었다. 저것뿐이라면. 나는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먹은 것이 얹힌 것처럼 기분이 좋질 않았다. 복도를 지날 때마다 여학생들이 보내는 색기 담긴 시선도 싫었다. 불길한 느낌을 지우며 나는 책상에 엎드렸다. 없어진 물품들을 메우기 위해 여동생들의 방에 들어갔다. 내 방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호화로운 방이었다. 짐짝 몇 개만 던져놓은 자신의 방과는 극과 극이었다. 그들은 돈을 아무데나 두는 경향이 있었다. 서랍을 열면 구겨지거나 빳빳한 만 원짜리 몇 십장이 아무렇지 않게 굴러다녔다. 새아버지는 그녀들에게 돈 쓰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일본으로 여행을 갔기 때문에 돈을 타낼 수 없어 하는 수 없이 열 장을 훔쳤다. 새아버지가 벌어온 이렇게 마구 버려진 돈 따위를 훔치는 것엔 죄의식조차 들지 않았다. 장유미는 그 후로도 몇 번 찾아왔다. 반 입구에서 기웃거렸고 교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기도 했다. 나는 그녀가 사랑을 주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돈을 내밀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여동생들 방에서 훔치는 것도 한두 번이지 반복되면 걸릴 것이 분명했다. 애초 삼 일로 예정되어 있던 어머니의 여행은 새아버지까지 가세하여 이 주일로 늘어났다. 몇 번이나 정주한의 일행들이 그녀를 욕하고 화를 내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그것은 아름다운 그라비아 모델을 향해 있는 것이 아닌 나를 향해 있는 것이었다. 급식은 자유였다. 죽 같은 점심을 먹는데 돈을 쓰는 것이 아까워 나는 도서실로 책을 빌리러 갔다. 도서관에서 한창 책을 고르고 있는데, 누군가 손에 집어든 책을 밑에서부터 툭 쳐서 바닥에 떨어트리게 했다. “한가하니 좋네?” 김수영이었다. 나는 떨어진 책을 주워 원래 자리에 꽂았다. 그의 갑작스런 등장에 빌리고자 했던 책 제목이 생각나지 않았다. “밥도 안 먹고 여기 숨어 있는 거냐? 그럼 꽤 머리가 좋은데?” “숨다니, 내가 왜.” 그는 책장에서 뽑으려는 책을 손으로 탁 가로막았다. 나는 그를 쳐다보았다. 일행들보단 머리가 조금 길고 눈매가 긴 수려한 인상이었다. 적당히 큰 눈에 낮은 음성, 그는 욕설 같은 것은 사용하지 않고 나를 구석으로 몰았다. 거슬리는 말이 없어 그들과는 질이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꺼내려는 얘기의 주제는 같았다. “사람이 얘기를 하는데 책이나 들추면 예의가 아니지. 난 위협하려고 하는게 아냐. 좀 주의를 주고 싶은 몇 가지가 있어서 그런 거지.” “......” “네가 전학 오기 전에 너처럼 행동하던 놈이 하나 있었는데, 결국 자살했어.” 자살. 그 단어에 본능적인 통증을 느꼈다. “너보단 힘도 없고 멍청한 놈이긴 했지만 네 하는 꼴을 봐선 결론은 같은 길을 갈 것 같은데.” “비켜.” 그가 주먹을 뻗어 나의 가슴팍을 지그시 눌렀다. 그저 누르는 것일 뿐인데도 힘이 느껴졌다. 좁은 공간에서 단둘이 마주하고 있으니 그의 숨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담배 냄새가 배어있는 숨은 S가 내 얼굴에 대고 뿜어내던 향과 흡사했다. 같은 담배를 피우는 것일까. 아니면 단지 착각일까. “멍청하게 굴지 마. 살고 싶으면 최대한 몸을 숙이고 중규나 상호가 어떤 짓을 해도 반응하면 안 돼.” “걔들을 쓰레기 취급하는구나. ” “난 또 한 번 시체 치우기 싫으니까 이런 말 하는 것뿐이야. 저번 놈은 학교에서 죽는 바람에 얼마나 골치 아팠는지 넌 모르겠지. 섣불리 다른 여자 사귀지 마라. 그럼 시체가 두 구다.”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구나.” 그가 가볍게 웃었다. “그렇게 항변하지 말라니까. 장유미는 주한이가 일 년이나 공들인 여자야. ” 나는 머리를 저었다. 모든 것이 귀찮았다. “흐흥. 못 알아 듣네.” 수영은 내 옷을 모아 쥐고 앞섬을 푸를 듯 비틀었다. 단추 두 개가 풀려나갔다. 무의식적으로 나는 교복 셔츠 깃을 모아쥐었다. 이 것 봐라 하는 듯 그는 나의 셔츠 단추를 두 개 더 풀었다. 가슴팍이 드러나자 손가락으로 장난치듯 가볍게 훑었다. “ 예민하네?” 그는 도서관에 나를 남겨두고 사라졌다. 점심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멀리서 울리는 종소리가 귓 속에도 파동을 일으켰다. 어머니가 여행에서 돌아왔다. 나는 그나마 자금줄이 풀린 것에 감사했다. 어머니가 쇼핑에서 사온 것은 물건이 아니라 사치였다. 똑같은 디자인의 옷을 색깔별로 사오질 않나, 변해버린 어머니의 모습에서 이질감을 느꼈다. 어머니가 사온 물건의 절반 이상은 이복 동생들의 선물이었고 내 것은 지갑 하나가 유일했다. 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아 걸었다. 그들만의 웃음 소리가 윗층까지 따라올라왔다. 책을 펴도 머리에 들어오는 것이 없었다. 재혼한 후 내 생활은 엉망이었다. 다른 곳으로 전학을 가야했고 성적을 떨어트지지 않기 위해 전보다 피터지게 공부해야만 했다. 전에는 단지 어머니를 기쁘게 하기 위해 공부했다. 아니 그건 거짓말이다. 그 이유엔 S도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어머니와 둘이서 지방 도시에서 전셋집에 살 때 훨씬 안온했다. 그러나 금세 머리를 흔들어 생각을 지웠다. 혼자 일을 다니면서 피로에 절은 어머니 보다는 그래도 여행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지금이 낫다고, 주문을 걸 듯이 몇 번이고 되뇌였다. 책장을 보았다. 무수하게 꽂혀진 참고서와 세계 명작 도서 뒤에, S가 남긴 것들이 있다. 차마 버리지 못하고 여기까지 가져 왔다. 나는 안된다고 몇 번이나 도리질 치면서도 책장으로 다가가 그가 남긴 책 몇 권을 가방에 넣었다. 사실 S 만 아니었다면 어머니가 재혼을 하든 어떻든 그 도시에 남아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 가방이 통째로 없어졌다. 마치 오늘 S의 책을 갖고 온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좀 뜸하다 싶어 방심한 것이 화근이었다. 체육시간 내내 햇빛 아래서 탈진할 만큼 뛰고 돌아와보니 가방이, S의 책이 없어졌다. 사색이 되는 찰나 뒷자리에 앉는 녀석이 쪽지 하나를 주었다. [서관 뒤 창고] 비밀 작전이라도 되는 듯 그는 쪽지만을 주고 자기 할 일을 계속했다. 믿어도 될까를 의심을 할 사이도 없이 서관 뒤를 향해 뛰었다. 서관이 어딘지도 몰랐다. 단지 그저 달려갈 뿐이었다. 왠만한 대학 건물보다 넓은 학교 뒤편에 외진 창고가 하나 있었다. 해프닝일 뿐이다. 창고 입구에서 숨을 가다듬으면서 나는 되뇌였다. 그러나 이 상황에 적용하기에 해프닝이라는 단어의 어감은 한없이 가벼웠다. 먼지를 헤치면서 가방을 찾았다. 안에 있는 것들을 찢기라도 했으면 어떡하지... 체육시간에 흘린 땀에 먼지가 달라붙었다. 쿨럭. 기침을 하자 먼지가 뽀얗게 일어났다. 눈이 온통 따가웠다. 창고의 철문이 요란스레 열렸다. 햇빛을 등지고 네 명이 서있었다. 거대하게 보이는 그들과 키를 맞추기 위해 나는 몸을 일으켰다. 이미 그들의 다음 행동은 짐작이 가능하고도 남았다. 확실히 함정이었다. 나는 아둔했다. 정주한은 걸려든 똥개를 보는 듯한 눈으로 나의 얼굴을 훑었다. 목덜미까지 쭉 훑는다. 그는 생수를 손에 들고 있었다. 지례 고개를 숙이지 않으려고 애썼다. 잘못한 것이 없으니까. “우습네. 장유미가 만나자고 하면 꽁무니 빼고 한 번도 안나가는 새끼가, 허벌덕신해서 찾고 있는 꼴이라니.” 멀리서 수업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이 학교의 종소리는 유난히 비장하다. 그들은 창고 문을 닫아 걸었다. 수업이라면 그들 또한 예외가 아닐텐데 개념을 상실한 놈들이었다. 김중규와 정상호가 번갈아 주먹을 날렸다. 무슨 말이든 하려 했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오랫동안 굶주린 것처럼 그들은 주먹질을 해댔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왜 그들이 주먹을 휘두르는가. 맞아야한다면 차라리 정주한이 때려야 옳았다. 유치하든 뭐든 무식한 두 놈은 끼어들 필요가 없는 문제다. 도서관에서 자신에게 조언이랍시고 떠들던 김수영은 담배를 피워물고 관조하고 있을뿐이었다. 정주한은 얻어터지고 있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있었다. 가장 비열한 인간이었다. 정주한이야말로. “비열한 자식.” 잇사이로 그 말이 나왔다. 아무말도 하지 않으려 했는데 어쩔 수 없었다. 때리던 주먹이 멈췄다.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로 나는 주한을 올려다보았다. 눈에서 핏줄이 터졌는지 그의 무표정한 턱에 피그물이 씌워져 있었다. 쏘는 것 같은 길게 찢어진 눈이 가까이 다가왔다. 얼굴에 피라도 범벅이 된 걸까. 주한은 양 손을 펴서 나의 얼굴을 진득하게 쓸었다. “목 마르지?” 정주한은 물을 마시고 있었다. 사실 목이 탔다. 물통 안에서 일렁거리는 물이 그렇게 탐스러워 보일 수 있었다. 그러나 눈을 깔고 고개를 저었다. “구라는... 기다려봐. 먹여줄게.” 그들은 나의 팔을 뒤로 돌려 손목을 묶었다. 힘줄이 팽창했다. 다음 순간, 정주한은 물통을 통째로 나의 입안에 꽂았다. 물이 콸콸콸 쏟아져 들어왔다. 코를 틀어막고 목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붙잡았다. 물먹인 소처럼 기도 속으로 물이 통째로 빨려 들어갔다. 김수영은 창고 입구에서 새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라이터에서 불꽃이 홀쭉하게 솟아나왔다. 그가 말한 시체 만드는 일이 이런 것이었을까. 조언해줬음에도 알아서 행동할 줄 모르니 이젠 완전히 내 손을 떠났다는 듯 유유자적한 분위기였다. 차라리 단순하고 험악한 김중규의 얼굴을 보고 있는 편이 나았다. 단정한 김수영의 옆모습은 더 큰 굴욕을 느끼게 했다. 정주한은 페트병 하나를 다 쏟아부을 때까지 나를 놓치 않았다. 온 몸이 물에 젖고 구토가 일었다. 물을 마시기 전까지 목이 말랐으나 고문처럼 물을 받아들이고 나니 오히려 목이 탔다. 목구멍의 쓰라림을 느끼면서 나는 몇 번이나 기도에 걸린 물을 게워냈다. 앞니가 시렸다. 고문관처럼 굴던 정상호와 김중규는 먼저 창고를 나갔다. 남은 사람은 정주한과 김수영 뿐이었다. 나는 모로 쓰러진 상태에서 몸을 일으킬 수 없었다. 이게 끝일까. 인내할 수 있는 한계는 언제고 다시 찾아왔다.언제나 끝을 바랬다. 이것이 끝이길 바랬다. “너 장유미랑 잤지?” 물과 토사물에 젖은 모습으로 타인 앞에 누워 있는 것은 두 번째다. 나는 대꾸 없이 바닥에 침을 뱉었다. 부정의 의미였다. 그는 내 머리를 잡아 방금 뱉은 침 위에 얼굴을 문질렀다. 신음이 절로 딸려나왔다. 그는 시계를 보면서 발로 집요하게 나의 사타구니를 비벼댔다. 신음이 점점 커져갔다. 그는 아픔을 유도하는 것이 아니다. 요하는 것은 치욕이다. 오분 정도 그랬을까. 나는 몸을 구부리며 고통스럽게 눈을 감았다. “화장실 가고 싶으면 일어나서 가 봐.” 멀찍이 서 있던 김수영이 담배를 버리고 가까이 다가왔다. 그가 와서 내 버클에 손을 댔다. 그의 유유자적한 표정에서 들키고 싶지 않은 영역을 들켜버린 느낌이었다. 도서관에서부터 김수영은 나를 뭔가 다른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완전히 더럽혀져 흙으로 더럽혀진 바지에 김수영의 손이 닿았다. 그는 벨트를 푸르고 서서히 내 지퍼를 내렸다. “ [형. 풀어주세요. 제발] 해봐. 풀어줄게.” 김수영을 죽이고 싶었다. 새우처럼 등을 웅크리는 것과 동시에 창고 바닥이 소변으로 젖어 나갔다. 정주한은 선 채로 집요하게 눈을 떼지 않고 나를 내려다 보았다. 내 얼굴이 철저히 피해자의 것인 된 것에 만족하는 표정이었다. 분명 치욕적이었다. 그러나 나는 울지 않았다. 눈물이 나지 않았다. 처음으로 느끼는 감정도 행위도 아니었다. 가방은 마법처럼 다시 돌아와 있었다. 애초부터 창고근처엔 가지 않은 듯 깨끗했다. 안에 있는 S가 남긴 책들도 그대로였다. 버스를 타고 돌아오면서 가방을 꽉 끌어안았다. 몸에서 흙냄새가 났다. 가방에 코를 파묻고 집에 돌아와 어색한 저녁 식사를 하고 자리에 앉아 영어단어를 외웠다.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F다. fact... fascination 매혹, 이런 단어가 정말 시험에 나올까..? 창고 바닥에 쓰러져 있는 나를 두고 떠나면서 그들은 몇 마디를 지껄였다. 장유미가 나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꽤나 거슬리는 모양이었다. 무결한 인간들을 발밑에 짓눌러 빌게 할 때의 쾌감, 그것을 정주한과 김수영은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의 쾌감을 자극시키는 것은 내가 울거나 빌거나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둘 중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전학 와 첫날부터 나는 도도하게 행동했다. 새침하게 얼굴을 틀고 누구도 쳐다보지 않았다. 여자들이 몇 홀려 들었다. 지방도시에 있었을 때의 나의 과거를 안다면 누구도 대쉬하지 않았을 텐데. 그것을 안다면 정주한 패거리들은 날 망치려 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사 일간의 시험 후 새로 자리배치가 있었다. 담임은 무신경한 인간의 전형으로 내 새 자리는 김수영의 옆이었다. 김수영은 내 쪽으로 얼굴을 향하고 엎드려 있었다. 눈을 감은 얼굴선은 부드러웠다. 매끈한 얼굴, 콧날.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나는 펜을 쥔 손을 쳐들었다. 창고에서 내게 저지른 짓 따위는 조금도 모른다는 듯 태평한 얼굴. 그 깊은 수면을 펜촉으로 푹 찔러 버리고 싶었다. 손을 휘두르려는데 그가 눈을 뜨고 내 손목을 잡았다. 팔이 잡힌 채로 얼굴을 돌려 그를 외면했다. “계속 해봐. 한 손 남았잖아.” 자는척 하면서 꿰뚫어보고 있었다. 마치 당연하다는 것처럼. 그가 쥐고 있던 내 팔을 휙 뿌리쳤다. 한 손을 턱에 괴고 그가 물었다. 보지 않았지만 잠의 기운이 다 가시지 않아 나른한 얼굴이리라. “전에 있던 학교에서도 이렇게 뻣뻣하게 굴어서 쫓겨온 건가?” “......” “물어도 대답 않으면 읽고 있는 책 찢어버린다. 물론 내가 직접은 안 할거야. 언제든 정력 뻗치는 두 녀석이 대기하고 있으니까.” “집이 이사왔어. 그 뿐이야.” “흠.” 그가 자세를 똑바로 하더니 어깨에 손을 얹어 바짝 끌어당겼다. 나는 그를 뿌리치려 했다. 흣 웃으며 그가 어깨에 두른 팔에 더 힘을 주었다. 돌이 얹혀 있는 것처럼 온 몸이 경직되었다. 귀를 막자 손등에 입술을 갖다대고 뭐라 뭐라 중얼거렸다. 느낌을 지우고 싶어 화장실로 가 손을 씻어냈지만 지워지지 않았다. 기말고사가 끝나자마자 이복여동생들은 파티를 열었다. 부모님도 모임으로 집을 비웠겠다 그들로썬 호재였다. 방밖으로 나오다가 우연히 그들의 친구와 맞추치자 이복동생의 친구는 “누구야? 새로 보는 얼굴인데” 라고 물었다. 여동생은 기분이 상한 얼굴로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친구를 끌고 일 층으로 내려가 버렸다. 남은 한 명이 혀를 끌끌 차며 한심하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빨리 꺼지라는 의미였다. 네 엄마가 없을 땐 너도 이 집에선 불순물에 지나지 않아. 그 눈은 나를 향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집 밖으로 나왔다. 경찰이 오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시끄러운 소음이 계속되고 있었다. 거실 한 복판에 틀어놓은 음악이 쿵쿵쿵쿵 대문을 닫을 때까지도 귓가에서 울렸다. 저 음악에 맞춰 그녀들은 남자들과 엉켜 미친 듯이 춤을 추고 있으리라. 하늘이 흐렸다. 구 름이 잔뜩 낀 우중충한 밤이었다. 근처 식당에 가서 밥을 먹으면서 책을 보고 있는데 요란한 소리와 함께 서너명이 들이닥쳤다. 패밀리 레스토랑도 많은데 왜 하필이곳인지. 혼자 조용히 저녁을 해결하고 밤을 새울 곳을 모색한 작정이었으나 그들은 나를 발견하고 말았다. 식당 안에서 요즘 한창 TV에서 자주 나오는 익숙한 팝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두명의 미끈하게 빠진 여자가,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고 춤추는 동영상을 쳐다보며 그들이 깨끗하게 치워진 테이블의 한 쪽에 앉았다. 태도가 불량한 그들의 심상찮은 공기를 느끼고 주위 사람들이 일순간 조용해졌다. 정상호는 다짜고짜 내 팔을 잡아 자리 옆자리에 끌어앉혔다. 칸칸이 분리된 패밀리 레스토랑 특성상 뒷테이블도 옆도 잘 보이지 않았다. “주문하시겠습니까?” 서버에게 이것저것 시키고 난 후 그들은 밥맛 떨어진다는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정상호가 숨을 쉴 때마다 압박감이 느껴졌다. 질식사시킬 것 같이 커다란 손이 테이블 위에 얹혀져 있었다. “왕따 새끼, 넌 이런데 밥도 혼자 처먹으러 오냐? 나라면 안 먹고 말지. 물론 혼자 올 일도 없겠지만.” 서버가 음식을 날라다주자 이젠 올 필요 없다고 허세를 떨며 김중규는 말했다. 그는 나를 하인부리듯 부릴 작정이었다. “그 많던 년들은 다 어디가고 너 혼자야. 서버도 없으니 무릎꿇고 시중 들어봐, 빵빵한 다른 언니들은 그렇게 하던데.” 그는 테이블 밑으로 내 무릎을 걷어찼다.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은 음식을 많이도 시켰다. 이걸 세 사람이 먹는다니. 믿을 수 없다. 김중규는 한 번 더 무릎을 찼다. 나는 김수영이 여유롭게 빙긋 웃으며 칼로 고기를 써는 것을 지켜봐야만했다. 그들의 식사는 급하고 길었다. 사복을 입고 그들과 마주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교복을 입을 때보다 너댓살은 많아 보였다. 건너편에 내가 시켜놓은 음식은 서버가 이미 걷어간 후였다. 반도 먹지 못했는데... 점심도 못먹은 터여서 배가 고팠다. 그들은 게걸스럽게 다섯 가지 메뉴를 먹어치웠다. 식후 담배를 피우면서 정상호가 내 머리통을 뭉개버릴 듯 강하게 쓸었다. “이 새끼 창고에서 그리 교육을 시켰는데 엉망이란 말야. 물 한 잔 떠오라고 해도 조용히 떠오는 법이 없네.” 정상호의 손이 목덜미를 훑었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김수영은 정상호와 나를 훑고 있었다. 한 프레임에 넣고 관찰하듯 시선이 불쾌했다. “이거 놔.” 땀으로 축축한 그의 손이 불쾌했다. 그의 팔을 밀어내려고 했지만 밀리지 않았다. 그는 좀 더 우악스럽게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낄낄대면서 통화를 하고 있는 김중규와 그 옆에 앉아서 느긋하게 입을 닦는 김수영. 더 이상 참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음식 찌꺼기가 남은 포크를 집어 그의 허벅지를 힘껏 찔렀다. 천을 뚫었지만 포크는 금방 튕겨져 나왔다. “악! 씨발.” 그는 허벅지를 움켜쥐는 동시에 나를 홱 뿌리쳤다. 이유없는 폭력도 이런 대접도 질색이었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포크를 다시 잡았다. 말보다 주먹이 앞서던 놈들 세 명이 나를 동시에 쳐다보고 있었다. 건드리면 꿈틀하는 지렁이를 발견한 것 같은 눈이었다. 나는 테이블 위에 포크를 집어던져버렸다. 음식 위로 포크가 떨어지면서 남은 국물이 김중규의 옷에 흠뻑 튀었다. 핏자국 같이 셔츠 깃을 흘러내렸다. “두리번거리지도마. 넌 저기 붙어있는 장식물 바닥에 깔린 카펫만도 못한 놈이니까 입 열지마. 입 열면 칼로 찢어버린다.” 처박혀 있을 수 있던 이층방을 그리워하게 될 줄은 몰랐다. 오후 내내 들었던 파티 음악은 정주한의 집에서도 울리고 있었다. 무슨 고정 레퍼토리라도 가지고 있는지 트로트 메들리처럼 열 곡의 노래들이 거의 반복적으로 흘러나왔다. 이복동생들이 몸을 흔들어 대던 바로 그 음악이었다. 나는 불과 몇 시간 만에 공간이동을 한 것처럼 정주한의 집에서 벌 서는 것처럼 여자들 사이에 끼어 앉아있었다. 김중규는 셔츠를 버린 것이 끝내 기분이 상하는 듯 날 골목에 가둬놓고 패고 싶어하는 것 같았으나 김수영이 낸 제안을 받아들인 것 같았다. 나를 정주한의 집으로 데려가기로한 것이다. 말도 안되는 경고를 던져놓고 그들은 윗층으로 사라져버렸다. 식당에서 끌려나오면서 나는 필통을 흘렸다. 지퍼가 망가졌기 때문에 조금만 잘못 몸을 틀어도 안에 있는 물건이 쏟아졌다. 그들이 망가트려놓은 지퍼였다. 장유미의 편지를 찾는답시고 남의 가방을 망쳐놓은 주제에 그들은 내가 물건을 흘리자 마음껏 비웃으며 식당 옆 골목으로 나를 끌어갔다. 담배 꽁초와 대형 쓰레기더미들로 빽빽이 메워진 골목이었다. 김중규는 비웃듯 가방을 뒤집어 탈탈 털었다. 안에 담겨 있던 것들이 한꺼번에 오물 위로 쏟아졌다. 어머니가 며칠 전에 사다 준 지갑도 포함이었다. 김중규는 집게손가락과 엄지를 모아 그것을 벌레 잡듯 잡아 얼굴에 대고 흔들었다. “에르메스? 건방진 새끼.” “......” 그가 지갑으로 뺨을 툭툭 쳤다. “그건 버리지마라. 쓸만한 데가 있을 거 같아.” 김수영은 지갑을 거둬갔다. 가방 안의 내용물을 쏟아버리고 그들은 망가진 빈 껍데기랍시고 가방을 내 품에 안겨주었다. 그들은 바보였다. 정말 소중한 것은 지갑 따위가 아니었다. 나는 에르메스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진짜 원하는 것을 볼땐 아무리 감추려 해도 눈빛이 흔들리기 마련인데, 내가 그들이 망가트릴까봐 안절부절하는 것은 지갑이 따위가 아니라 망가진 가방이었다. 그들이 그것을 비굴해지라는 의미로 쥐어줬을 때 나는 작게 안도했다. 정주한의 집은 삼층이었다. 그리고 새아버지의 집과 별로 떨어진 위치가 아니었다. 외곽도 아니고 도시 중심가에 이런 집이 몰려 있다는 것이 놀라울 만도하지만 나에겐 그런 것이 모두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음악 수준은 여동생들과 다를 것이 없었다. 커다란 일 층 내부를 단조로운 선율의 반복이었다. 조명은 어둡고 차가웠다. 그 아래에서 몸을 흔드는 사람이 반 섞여서 엉켜있는 사람들이 반이었다. 고등학생들의 기말 시험을 끝난 기념이라고 하기엔 퇴폐적인 느낌의 파티였다. 나는 그들의 얼굴도 나이도 제대로 가늠할 수 없었다. 다만 몸을 비비는 사람들의 여파로 흔들리는 소파 위에서 오줌 싼 아이가 벌을 받듯 붙박혀 있을 뿐이었다. 그들이 끌고 온 나를 보고 정주한은 아무 말도 없었다. 그는 술에 취해 있는 듯 했다. 그냥 적당히, 라는 듯한 모션을 취하면서 여자들을 대하러 가버렸다. 김수영은 파티가 있는 것을 의례 알면서 나를 데려왔다. 환락적인 파티 안 그들의 영역 안에서 내가 철저히 소외당하는 것을 보고 싶었으리라. 그들의 기대대로 아무도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조명이 점점 밝아졌다. 그들이 조금씩 가져다 먹는 음식들을 나는 빤히 보았다. 사람들은 그것을 얼굴에 묻히고 목덜미에 바르면서 놀았다. 발린 것을 핥는 혀. 애초부터 먹는다는 의미와는 거리가 먼 생크림이 듬뿍 올려진 음식뿐이었다.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어딘가에서 번갈아 나를 쳐다볼 것이 분명했다. 정주한의 집은 집 내부로 계단이 나있어 3층까지 올려다볼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올려다보는 것이 가능하다면 내려다보는 것 또한 가능하고 그들은 나를 내려다보는 편을 택할 것이다. 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정면을 응시한 채로 빈 가방을 끌어안고 있었다. 시험기간 내내 제대로 자지 못했기 때문에 졸음이 몰려왔다. 음악은 이젠 거의 최면의 단계였다. 그 때 옆 자리에 앉아서 내내 남자랑 끌어안고 있던 여자가 팔짱을 껴왔다. 손이 무척 따뜻했다. “못보던 얼굴이네. 넌 누구야?” 여자의 입에서 독하디 독한 술냄새 그리고 달콤한 잔향이 뒤따랐다. “나는 채희연이야. 너는?” “........” “뭐라구? 이름이 안들려. 크게 말해봐.” “말한적 없는데.” "흐흥 그랬나?" 여자는 웃고 있었다. 시원스레 깔깔거리는 입이 불쾌하지 않았다. 최면의 단계에서 잠을 깨우는 종소리처럼 청명한 웃음이었다. 립스틱이 흰 피부 위에 조금 번져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번진 부위를 손으로 가리켰다. 여자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등으로 그것을 문질렀다. 립스틱이 좀 더 넓고 흐릿하게 번졌다. 키스 마크처럼 누군가에게 빨렸을 때 생기는 유한 핑크빛이었다. 희연은 술잔을 건넸다. “마셔, 넌 하나두 안 취했구나.” 여자는 양 손으로 잔을 잡아 진지하게 건넸다. 붉은 빛이 도는 액체가 담겨있었다. 그녀가 마시던 걸까. 독주 그리고 달콤함. 갑자기 음악이 빨라졌다. 여자와 나를 제외하고 모두가 한꺼번에 일어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희연의 옆에 있던 남자가 불쾌한 내색을 하며 자리를 떴다. 나는 술을 마셨다. “넌 주한이 친구니? 주한이는 친구 불러놓고 어딜 간거야. 있지, 이런데 와서는 재밌게 노는 거야. 가만히 있으면 재미가 없어. 정말 그래~ 내 말 믿어.” 그녀는 계속해서 잔을 건넸다. 여기 섞여 있는 것으로 봐 그녀가 감시자들과 별로 다르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방어선이 점점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화려하지만 어딘가 시골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빗장이 풀리는 것 같았다. 도시로 이사 온 내내 제대로 말을 걸어준 사람은 없었다. 어머니도 예외가 아니었다. 학교에선 혼란스런 일들 뿐이었다. 여자는 끊임없이 말을 건네오는 사람들을 상대하면서도 나를 붙잡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다. 나는 가방을 점점 더 꽉 쥐었다. 채희연이 얼굴을 가까이 댔다. 그녀는 충동적으로 내게 키스했다. 지금 이 공간은 충동 뿐이었다. 부드럽고 축축한 입술이 닿자 나의 입술이 자동적으로 벌어졌다. 혀가 미끄러져 들어왔다. 흐르는 침에 실려 희연이 마셨던 만큼의 취기가 전달되었다. 잊지 않고 있었다. 이러한 감각. 부드러움. 본능적인 반응을-. 오랜 시간 나를 지배했던 S 의 그림자가 감은 두 눈에 어른거렸다. 심장에 통증을 느꼈다. “가야겠어.” 나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길게 늘어진 조명장식이 이마에 닿았다. 의아하게 그녀는 풀린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난 그만 가야겠어. 나는.” 입구를 찾을 수 없었다. 사람들 사이를 지나쳐 가는데 들어온 곳이 어딘지 찾을 수 없었다. 제기랄. 나는 눈 앞에 가장 먼저 보이는 계단으로 올라갔다. 바로 붙은 문이 있었다. 무작정 열고 들어가자 세면대가 보였다. 물을 틀어놓고 얼굴을 씼었다. 벽 한 면 전체가 거울이었다. 입술이 붉게 물든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거울 속의 모습은 도시로 전학와 도도하게 유지하던 모범생의 그 모습이 아니었다. S 의 방에서 S 만을 기다리며 S 에게 철저히 길들여져 있던 얼굴이었다. 나는 거울에 물을 끼얹었다. 얼룩이 생긴 거울 안에서 물에 젖은 얼굴과 머리카락이 서서히 또렷해졌다. 나는 뒤로 물러났다. 화장실로 보이던 장소는 단순히 화장실이 아니었다. 안 쪽에 문이 또 있었다. 그 문을 열자 안에 작은 덧문이 있고 공간이 있었다. 나는 그 안으로 들어가 몸을 웅크렸다. 갑자기 자신이 없어졌다. 아무도 보고 싶지도 만나고 싶지도 않았다. 웅크리고 있는데 물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들어온 것이다. 숨을 죽였다. 손을 씻고 물을 잠궜다. 수건에 물기를 닦는 소리까지 생생히 들렸다. 갔다고 생각한 순간 덧문이 덜컹덜컹했다. 나는 벽쪽으로 붙어섰다. 본능적인 두려움이었다. “안에 있는 거 알고 있어.” 김수영의 목소리였다. 문고리를 쥐려는데 손에 힘이 더 이상 들어가지 않았다. 그가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냈다.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나를 끌고 올 때와 옷이 달라져 있었다. 좀 더 가볍고 화려했다. 여자는 술에 약이라도 타서 마시던 걸까. 정신이 혼미하고 당장 주저 앉고 싶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나는 벽에 기댔다. 그는 좁은 공간 안으로 들어오더니 문을 닫았다. 화장실 한 칸에 둘이 마주보고 있는 것 같이 좁았다. 향수냄새일까. 그에게선 박하향 같이 시원한 냄새가 났다. 창문을 열어놓으면 바람에 실려서 들어오는 한기 같은 섬찟한 냄새였다. “뒤에서 김중규가 칼 들고 너 죽인다고 따라오는 중이야.” 그는 조금 웃는 것 같았다. 어디까지가 농담이고 진담인지 알 수 없었다. 내가 나가려 하자 그는 몸으로 가로막았다. 키 차이는 크게 나지 않았다. 그를 밀치고 갈 수 있을까. “여긴 왜 들어왔지?” “문인줄 알았어. 나가는 문.” 나는 순순히 대답했다. 밀실이나 다름 없는 곳에서 김수영과 가까이 마주보고 있는 것은 즐겁지 않았다. “집에 가고 싶어?” “....응.” 그가 가까이 다가왔다. 냄새가 나를 자극하듯 더 가까이 느껴졌다. “사람이 말할 땐 눈을 봐.” 나는 얼굴을 들었다. 방금 전 소파에서 키스를 했다.입술을 벌리고 여자의 타액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S 생각을 했다. 잡혀와 소파 위에 앉아서 S를. S에게 낱낱이 벗겨지면서 느꼈던 굴욕적인 희열이 몸 속에 살아 있었다. 밀어넣으려 해도 여기 있다는 듯 꿈틀댔다. “마스터베이션 해 봐.” 나는 순간적으로 몸이 굳었다. “내 앞에서 해 봐. 성공하면 집에 보내줄게.” “... 미쳤어.” “안하면 넌 이 방에서 못 나가. 중규나 상호 또 다른 놈들을 동원해서 감시하도록 하지. 쥐새끼처럼 스스로 찾아들었으니 나갈 구멍을 만들어야 나갈 수 있지.” 나는 주르르 아래로 미끄러져내렸다. 김수영이 짧게 혀를 찼다. 그의 말은 거짓이 아닐 것이다. 시체로 만들고 쓰레기더미 위에 던져놓는다. 대개의 협박은 거짓이 아니었다. 반항하는 것보다 응하면 S는 아픔을 줄여주었다. 무서움을 느끼면 떠오르는 것은 온통 그런 기억들 뿐이다. 체념은 빨랐다. 나는 무릎을 조금 벌렸다. 옷 위로 페니스를 더듬어보았다. 완전히 힘이 빠져 죽어있었다. 김수영을 보았다. 새로 태어난 것처럼 깔끔한 얼굴로 고개를 비튼 채 내 꼴을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페니스를 비볐다. 동작이 어색했다. 지방도시를 떠난 후 나는 전혀 자위를 하지 않았다.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전학 와 삼개월 간이 가장 평온한 시간이었을까. S로부터 한 번도 연락이 없고 새아버지는 나를 경멸하는 눈으로 보던, 학교에선 유령이나 다름없던 삼개월이? 마찰시켜도 아프기만할 뿐이었다. 포르노 잡지도 비디오도 상대도 없이 무리였다. “야 정주한. 들어와봐.” “약속이 틀리잖아-" 내 목소리가 무의식 중에 떨렸다. 문이 열리고 정주한이 들어왔다. 공간은 더 좁아졌다.일어서려고 했지만 무릎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철컥. 김수영은 문을 잠궜다.정주한은 문고리를 등지고 서서 턱을 조금 들고 나를 훑었다. “김수영 너 뭐하는 거야.” “기다려봐. 내가 더 좋은 방법을 알고 있다고 했잖아.” 김수영의 목소리가 귀를 핥았다.그는 어느새 몸을 낮춰 바짝 다가와 있었다. 이 순간이 다시 올 것을 알고 있었던 듯 그는 팔을 뻗어 내 멱살을 쥐었다. 나는 김수영을 밀어내려 했다. 그러나 그가 도서관에서처럼 그가 손을 위아래로 몇 번 가볍게 흔들자 얇은 교복 단추가 맥없이 풀렸다. 가슴팍이 드러나자 그의 손이 성큼 셔츠 안으로 들어와 유두를 쓸었다. “아.” 나는 몸을 웅크렸다. 김수영은 웅크리지 못하도록 저지하며 좀 더 바짝 몸을 붙여왔다. “확실하지?” 확인 도장이라도 받듯 그는 내 유두를 비틀면서 정주한을 올려다보았다. “가만 있어봐.” 벗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애무하는 손은 집요했다. 그는 분명 알아챈 것이다. 도서관에서부터 아니 그 전부터 눈치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쌀쌀맞게 책을 읽던 그 순간 아니 내가 교실에 들어선 첫날에도 감을 잡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가 팔을 뻗어 내 버클을 풀었다. 서로의 쌕쌕대는 숨소리만 들렸다. 혐오스러움과 동시에 서서히 몸을 일으키는 쾌감. 그는 내 바지와 속옷을 반쯤 끌어내렸다. 거웃 아래 페니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잔인하게도 그의 손길은 거기까지였다. “뭐하는 거야. 추잡하게. 씨발. 장유미가 이 꼴을 봐야하는건데.” 정주한이 욕설을 지껄이며 나가버렸다.장유미 라는 이름에 술이 깨는 느낌이었다. 나는 비틀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보내줘.” 목소리가 묘하게 갈라졌다. 김수영은 나를 잠시 응시했다. 경멸하는 것도 비웃는 것도 아닌 그저 한 사람이 한 사람을 바라보는 눈이었다. 그는 약속을 지켰다. 정주한의 집은 복잡한 구조를 갖고 있었다. 사람들의 눈에 뜨이지 않게 그는 나를 뒷문으로 내보내 주었다. 뒷문은 겹문으로 되어있었다. 내가 나가자 쾅 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다. 벌써 밤이 다 지나고 아침 햇빛이 내리쬐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 오래 있었던가. 갑작스런 햇볕에 눈이 아파 순간적으로 눈을 감싸쥐었다. “잠깐.” 김수영이 뒷문을 열고 나왔다. 그는 손가리개를 만들며 얼굴을 찡그린 채로 나를 향해 가방과 지갑을 던졌다. 지갑은 몸에 맞고 앞쪽으로 튕겨져 나갔다. “고마워.” 나는 그것을 집어 곁에 있는 거대한 쓰레기통에 버렸다. 커다란 쓰레기통에 폭죽 케잌 등 파티 용품들이 엉망으로 쌓여있었다. 정원을 걸어나와 쇠로 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뒤에서 지켜보는 김수영의 시선을 느끼면서 나는 최대한 꼿꼿히 걸으려고 애썼다. 터덜터덜 정주한의 동네를 막 벗어나서 사람들로 혼잡한 길에 다다랐다. 모퉁이만 돌면 사람들 속에 섞일 수 있었다. 장사를 하는 사람들, 휴대폰으로 통화를 하며 걸어가는 여학생들이 뒤섞여 있다. 번잡함 속에서 그들은 활기를 지니고 각자의 길로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몸이 자꾸만 앞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버티려 벽에 손을 짚었다. 울컥 눈물이 솟았다. 햇빛이 눈부셔서일까. 한 걸음을 딛어 모퉁이를 돌지 못하고 결국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 연락도 없이 하루를 외박했다는 사실을 알고 새아버지는 나의 휴대폰을 압수했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그의 명의로 되어 있어 어차피 그의 소유였다. 걸려오는 전화도 없는 휴대폰이었다. 어머니에게는 그것이 피붙이가 아닌 자식에 대한 균등한 사랑으로 여겨지는 모양이었다. 나에게 어머니는 아버지가 너를 평등하게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거라고 말했다. 어머니의 몸은 내가 아니라 새아버지를 향해 있었다. 뜻을 거스르면 나는 어머니를 다시는 볼 수 없게 될지도 몰랐다. 자애로운 눈은 오랜만에 맛보는 행복으로 들떠 있었다. “네. 이해했어요.” 나는 어머니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기 위해 새아버지가 가하는 정신적 폭력을 긍정해야만 했다. 저녁엔 그의 사업상 손님이 온다고 했다. 침대에 쓰러지듯 누워 천장을 보았다. 천장을 가득 메우고 있는 무늬가 마음을 산란하게 했다. 누운 채로 눈만 감았다 뜨는 것만을 반복했다. 시간은 잘도 갔다. 설핏 잠에 빠져 있는데 가정부가 깨우러 왔다. 눈을 비비면서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벌써 그들은 식당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거실을 지나쳐 나는 천천히 식당으로 들어갔다. 커다란 나무 식탁에는 가정부가 오후 내내 어머니와 함께 준비했을 음식들이 차려져 있었다. 가에 앉으니 새아버지가 친절하게 웃으며 맞은 편의 사람에게 인사를 시켰다. 타인이 개입하면 가끔 나는 사랑스러운 아들이 되곤 했다. “안녕하세요.” 나는 얼굴을 들어 맞은편을 보았다. 온다던 손님이 정주한의 가족이었을 줄은 몰랐다. 모범 청소년처럼 옷을 깔끔하게 갈아입고 머리를 단정히 했지만 그는 분명 정주한이었다. 나는 유리잔을 집어 물을 마셨다. 컵을 쥔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자기 부모님 눈에 띄지 않게 입을 이죽거렸다. “같은 반이라던데, 친하게 지내면 좋겠네요.” 정주한의 어머니는 나의 어머니 만큼 인자하고 부드럽게 웃었다. 누가 누가 교양있는가를 겨루는 것처럼 이복동생들도 명문 사립의 올바른 자녀들이 되어 있었다. 식사 시간은 매우 분위기가 좋았다. 나는 정주한이 그렇게 말이 많은 사람인줄 처음 알았다. 부모님은 물론 새아버지가 묻는 질문에도 적당히 대답할 줄 알았다. 서로가 서로를 만족스럽게 바라보는 시선으로 가득찼다. 나는 이 가족의 장남처럼 여겨지고 있었으며 미래에 정주한과 아주 친하게 지낼 잠재력 있고 지적인 학생으로 취급되었다. 그의 입에서 몇 번이고 나온 우리 아들이라는 말이 귀에 맴돌았다. 그것은 친아버지로부터도 듣지 못했던 말이었다. 그는 거짓말쟁이다. 새아버지는 나를 그럴듯하게 소개했다. 나는 가만히 웃기만 하면 됐다. 식후에 부모들끼리 자리를 옮겼다. 이복 동생들은 방으로 들어갔다. 새아버지는 가정부에게 나의 방으로 정주한을 안내해주라고 했다. 어른들과 있으면 불편할테니, 친해질겸 같이 놀게 해주라는 것이었다. 가정부는 알아서 손님방으로 우리를 데려갔다. “필요한 거 있으면 부르시구요.” 가정부는 방까지 데려다 주곤 나갔다. 문이 닫혔다. 나는 몸도 돌리지 않고 닫힌 문을 바라본채로 가만히 서있었다. 당장이라도 문을 열고 나가고 싶었다. 그들의 접대에 나까지 장단을 맞추고 싶지 않았다. 평소처럼 그냥 외면하는 편이 나았다. 불륜해서 낳은 아이처럼 꼭대기에 숨기는 것이 차라리 좋았다. 그가 나를 이용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처음으로 이용가치가 생긴 걸까. 정주한과 같은 나이이고 같은 학교이기 때문에? 나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는 침대 위에 다리를 쩍 벌리고 앉아 목을 죄는 셔츠 단추를 풀어내리고 있었다. 그는 불쾌한 얼굴로 방을 쭉 훑었다. 기어다니는 벌레를 찍 눌러 죽일 때처럼 무책임한 얼굴이었다. 나는 어정쩡하게 허리에 손을 대고 서있다 창을 열었다. 바람 한 점 없이 습한 날씨였다. 방은 바닥이 나무로 되어 있었다. 정적이 흘렀다. 나는 창을 닫고 에어컨을 켜려고 했으나 작동법을 몰라 몇 번 눌러보다 포기했다. 방은 여러 개의 턱을 갖고 있었다. 나는 창가 쪽에 걸터앉았다. 그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마룻바닥이 시끄럽게 울리기 때문에 얼마큼 가까이 걸어오고 있는지 짐작 가능했다. “여기 네 방 아니지?” “.......” “여기가 무슨 방이야. 창고지. 우리 집 개우리 만도 못한데.” 나는 그를 무시했다. 여기가 창고라면, 진짜 내 방을 보면 과연 뭐라고 할까. 일어서려는데 그가 갑자기 확 팔을 잡아 잡아 당겼다. 짧은 실랑이, 삐걱이는 마룻바닥 소리가 내부에서 울리는 불협화음처럼 거슬렸다. 정주한은 나를 붙잡아 침대 쪽으로 확 밀어젖혔다. 어깨를 휘어잡는 손에서 강한 미움이 느껴졌다. 침대는 매우 푹신했다. 잘때마다 등이 배긴 내 침대와 격이 달랐다. 정주한의 손에 잡혀 나는 그런 생각 따위를 하고 있었다. “왜 너야. 하필. 일 년이간이나 공들였는데. 왜 유미가 너한테 목매는 거냐구.” 그는 스스로도 기가 차다는 듯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미치겠다는 표정이었다. “일 년이나 걸렸어?” “뭐?” “... 난 그렇게 노골적인 스타일 안 좋아해.” 그는 침대 위로 나를 쓰러트리고 무릎으로 배를 눌렀다. 내장이 뭉개지는 느낌이었다. 순간적으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방금 전까지 식탁 앞에서 정중하던 그였다. 깍듯하고 예의 발랐다. 그러나 지금은 개처럼 헐떡대고 있었다. “신나 냄새가 나.” “뭐?” “침대에서...” 그는 기가 차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러다가 뭔가 생각난 듯 몸을 바싹 붙여 얼굴을 가까이 했다. 개처럼 코를 목덜미에 대고 냄새를 맡았다. 그의 콧날이 턱에 몇 번이나 스쳐 간지러웠다. 정주한은 의혹이 이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그는 내 어깨를 쥐고 흔들던 자신의 손까지 냄새를 맡아보더니 얼굴을 조금 누그러트렸다. 그가 몸을 빼자 몸에 드리워져 있던 그림자가 사라졌다. 희게 잘 발린 천장이 보였다. 균열이라곤 찾을 수 없는 잘 만들어진 아치형 천장이었다. 몸을 일으켜 앉았다. 다시 한 번 장유미에게 아니 그 누구에게도 관심이 없다고 말해야 그가 믿을까. 서서 뭔가 잘 생각이 나지 않는지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정주한의 옆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 “심심해서 그래본 걸뿐이지 걘 널 좋아한게 아니야. 니가 나보다 우월하단 것도 아니고.” 나도 바라던 바야. 나는 그 말을 삼켰다. 아이가 시기심을 부리듯 중얼거린 그는 더 이상은 날 건드리지 않고 뭔가 시간 때울 것을 찾고 있었다. 책장과 서랍을 제멋대로 뒤집어 보곤 어이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럴만도 했다. 그 곳은 텅 비어 있을테니까. 사람이 살지 않는 방이었다. 겉은 풍요롭지만 신나냄새로 가득차 있었다. 샤워를 하고 싶었다. 샤워 후엔 수면제가 필요할 것 같았다. 오늘은 적어도 세 알은 먹어야 정주한의 날선 얼굴이 꿈 속에 배어들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침대에 모로 누워 눈을 꽉 감았다. 어머니가 잠시 들렀다. 그녀는 내가 정주한과 적절히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가 궁금해서 들어온 것이 분명했다. 나는 침대에 누워있던 것이 미안해졌다. 정주한은 방금까지의 태도는 잊은 듯 어머니에게 매우 정중했다. 어머니는 앞으로 몇 달간 정주한과 내가 함께 과외를 받게 될 거라고 말했다. 그녀는 자꾸 나를 낭떠러지로 밀어갔다. 가방을 버렸기 때문에 학교에 들고 갈 가방이 없었다. 봇짐을 만들어 메고 갈 수도 없을 노릇이었다. 나는 어머니에게 얘기하지 않고 근처 할인 마트에 가서 가장 눈에 안 띄는 검은 색 백팩을 샀다. 내 존재도 고리에 걸린 수백개의 똑같이 생긴 공산품 가방처럼 사람들 속에 묻혀지고 싶었다. 새아버지는 정주한의 방문 이후 학교까지 기사 딸린 차를 대주었다. 이복동생들의 명문 사립 여고에 내려주고나서 내 차례였다. 나는 항상 학교로 가는 길목 중간에서 뛰쳐내리고 싶은 욕구를 느꼈다. 과외는 수업이 끝나고 일주일에 두 번이었다. 선생은 최고 명문사학 출신으로 이미 그 쪽 세계에서 유명한 사람이라고 했다. 나는 그의 수업 방식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가장 싫은 점은 과외가 정주한의 방에서 진행된다는 점이었다. 정주한이 내 방을 창고로 여긴것도 어쩌면 당연했다. 그의 방은 안그래도 큰 곳을 두 개로 터서 하나로 만들었고 한 면 전체가 AV장식장으로 되어 있었다. 언급하기 싫을만큼 많은 가구들. 그의 방은 도무지 절제라는 것이 없었다. 선생은 애초 수준 차이가 심한 두 사람을 가르치는 것이 무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가 듣는 앞에서 내가 맞춰주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아무래도 나는 그의 성적을 끌어올리기 위한 롤모델로 고용된 것 같았다. 제 삼자가 끼어들 때의 정주한은 얌전한 편이었다. 부모들이 거실을 지키고 있을땐 더욱 그랬다. 학교 안에서 그가 부리는 폭압은 거의 상상할수도 없었다. 과외 선생이 있을때 우리 관계는 비슷한 경제 환경을 가진 부유한 집안의 친밀하진 않아도 안면이 있는 남자아이들에 불과했다. 그의 부모들은 아낌없이 나를 칭찬했다. 정주한이 있는 앞에서는 더욱 그랬다. 외모나 성격 성적 집안 어느 것 하나 흠잡을 곳이 없다고 칭송했다. 나의 거북함은 날이 지나도 희석되지 않았지만 어느 정도 익숙해갔다. 그들이 언급하는 그 훌륭하고 깨끗한 청년이 바로 나라면, 나는 어느 정도 젖어들었다. 선생이 눈을 돌리거나 잠시 자리를 비우면 그는 포르노 잡지를 꺼내곤 했다. 주로 일본 잡지들로 여자들이 가슴을 드러내놓고 있는 사진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가끔 소녀가 마스터베이션 하는 듯한 제스쳐를 취하는 사진이 있으면 그는 나를 우습다는 눈으로 쳐다보곤 했다. 그는 어렴풋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 날 그 욕실에 붙은 방에서의 일을. 정주한은 공부를 하지 않을뿐이지 바보는 아니었다. 우리는 함께 영어를 외우고 수학공식을 풀었다. 성적은 좁혀질 줄 몰랐으나 수험이 얼마남지 않았다. 선생이 찍어준 기출문제를 풀면서, 나는 내가 진짜 고등학생처럼 살고 있는 것인가 자문해보았다. 선생이 늦게와 단 둘이 방 안에서 그가 오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가장 싫었다. 그것을 제외하면 그럭저럭 참을만 했다. 포르노 잡지를 뒤적이는 등의 도발도 점점 숫자가 줄어들었다. 그것이 더 이상 나에게 어떤 불안도 가져다주지 못하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을까. 창 밖에서 들어오는 여름의 습한 바람을 맞으면서 우리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선생이 오기를 기다리며 정주한은 담배를 피웠다. 그의 방에선 창문 밖으로 나뭇가지가 뻗은 것이 아주 잘 보였다. 하늘과 창가를 향해 손을 뻗고 있는 나뭇가지 끝에 햇빛이 산산히 반사되었다. 마치 산란을 하러 떠나는 물고기의 비늘처럼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이는 순간들이 있었다. 그러나 방의 주인은 정주한이었다. 그는 그 모든 것을 뒤집는 권한 또한 지니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잠시 망각했다. 그는 내내 부모들이 나를 칭찬한다는 것에 대해 화가 나있었다. 내게 집안 좋은 도련님이라고까지 비아냥거렸다. 정말 집안 좋고 귀티나는 도련님이 하는 그런 질시어린 말을, 나는 묵묵히 들으면서 쓴웃음을 참았다. 이제 그에겐 장유미같은 핑계는 필요치 않았다. 적잖은 분노를 품는 정주한을 보고 왜 과외하는 방에서 도망치지 않았을까. 나는 도망쳤어야만 했다. 미술 선생은 봄에 하지 못한 사생대회를 겸해 그림 도구를 들고 학교 안에 있는 공원로 가라고 했다. 무엇이든 그리면 되었다. 방학을 앞두고 거의 최초의 여유였다. 한여름의 진득한 기운은 학교 뒤에 있는 공터에선 예외였다. 이 학교에서 가장 빼어난 점은 넓은 호수가 있는 공원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무들이 바람이 부는대로 몸을 비비면서 좋은 소리를 냈다. 해병대 출신인 선생은 커다란 막대기를 휘두르며 애들이 제대로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를 감시하러 다녔다. 김수영과 정상호는 선생의 눈을 피해 담배를 피웠다. 나는 호수를 바라보고 앉았다. 호수 수면 위에 어룽지는 나뭇가지들을 스케치하기 시작했다. 정상호는 그림에는 관심도 없었다. 그는 호수에 돌이나 던져가면서 담배를 피우며 선생이 오나 안오나를 감시할 뿐이었다. 내 주위에 걸터앉은 김수영은 펜을 들고 무언가 스케치했다. 호수는 부옇게 흐려있어 정확히 잡히는 것이 없었다. 나는 갸름하게 파여 있는 호수에서 사람의 얼굴을 연상했다. 자연스럽게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머리카락의 결을 살렸다. 그려지는 사람은 남자였다. 콧대와 피부, 눈을 스케치했다. 아무것도 칠하지 않고 그냥 두었다. 눈 밑에 건강해보이는 음영을 넣었을 뿐이었다. 나무들이 흔들리는 소리가 더 심해졌다. 색을 칠하면 그가 정말 흰 종이를 뚫고 걸어나올 것 같았다. 복잡한 생각들 때문인지 나는 그런 터무니 없는 망상에 시달리는 날들이 많아졌다. 체육시간의 일환으로 호숫가를 산책하고 있던 여학생들이 그림을 구경하려 다가왔다. 학교에서 나눠주는 체육복도 있지만 그런 시대에 뒤떨어진 옷을 입는 여학생들은 없었다. 그 중에서도 장유미는 붉은 핫팬츠 차림이어서 한 눈에 띄었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그라비아였다. 놈들을 가장 쉽게 화나게 할 수 있는 그녀였다. 나는 장유미를 돌아보지 않았다. 장유미가 가까이 다가왔다. 이미 음담패설에도 도를 통한 듯 그녀는 정상호가 뒤에서 뭐라 중얼거리는 말을 파리가 윙윙 거리는 소리로도 생각지 않는 기색이었다. “나도 이렇게 그려주면 좋겠는데. 난 더 좋은 포즈도 취할 수 있어 -.” 장유미는 내가 보든 보지 않든 트레이닝복 어깨 한 쪽을 내리는 시늉을 했다. 장유미는 눈을 반짝였다. 정주한과 그 무리들이 이쪽을 보는 것을 알고 있었다. 철저히 무시하는 것만이 상책일까. 아니면 그것이 더 화를 돋우게 되는 것일까. 그라비아는 4B연필을 쥐고 있는 내 손을 가만히 잡았다. 나는 그 손을 가만히 거두게 했다. 뒤에서 신음 비슷하게 뱉어내는 소리가 들렸다. 장유미의 담력은 최대였다. 그녀는 한껏 교태를 떨어대다가 뺨에 살짝 입술을 갖다댔다. “나 너랑 자고 싶어.” 나 너랑 자고 싶어. 나는 눈을 깜빡였다. 숱한 거절 속에서 그녀는 어떻게 이런 평정한 상태를 유지할까. 자신을 추앙하는 이들이 뒤에 버티고 있기 때문일까? 정주한이 견디지 못하고 다가와 그녀의 팔을 낚아 챘다. 그녀는 더러운 것이 닿은 것처럼 쌀쌀맞게 한 번에 뿌리치고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유유히 걸어가버렸다. “허... 저년이 정말.” 정상호는 어깨로 나를 쳤다. 연필선이 어긋났다. 담배 냄새가 진하게 났다. 정상호는 폭력적으로 내 스케치북을 들어올려 그것을 일행들 쪽으로 던졌다. 그림이 그들의 발치로 정확히 떨어졌다. 김수영은 시선을 내리 깔았다. 내가 채색한 그림 속의 사람은 S 였다. 호수는 바람에 따라 물의 결이 바뀌었다. 김수영이 자신이 그리던 스케치북을 집어 함께 바닥에 던졌다. 그는 그것을 전혀 중요치 않게 다뤘다. 흰 백지 안에는 옷을 입지 않은 남자가 있었다. 얼굴 중 눈만 그려져 있는 반나신의 몸이었다. 눈은 채 마르지 않은 회색 물감이 번져 눈물자국처럼 턱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게 누구야?” 허리를 비틀고 있는 나신. “글쎄.” 흘리듯 그렸으나 나는 김수영이 내 심장에 칼을 박는 방법을 제일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호모새끼. 정주한의 타는 듯한 눈이 그렇게 뇌까렸다. 내가 장유미를 받아들이는 것도 거절하는 것도 그에겐 모두 수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정상호를 뒤로하고 검은 물감을 들어 그들 쪽으로 다가갔다. 바닥에 나란히 버려져 있는 캔버스 위에 뿌렸다. 한 시간이나 공들인 S의 모습이 점점 사라졌다. 공허하고 매끄러운 피부 그리고 다섯 개의 손가락이 달린 부드러운 손등에 검은 물이 튀었다. 나는 오염된 그림을 말아 호수 안에 던져 넣었다. 그림이 입을 벌리고 호수물을 삼키듯 천천히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림을 제출하지 않은 죄목으로 나는 방과 후 미술실로 불려 갔다. 선생은 채점 중이었다. 낮에 제출한 그림들을 보고 수준이 한심한지 끄응 하는 소리가 멀리까지 들렸다. 선생은 반장을 불러 그림들을 모두 나눠주라고 이른 후 나를 불렀다. 그는 있는 힘껏 내 얼굴을 때렸다. 제출하지 않은 다른 놈들이 안 왔으니 그들 몫까지 함께라고 했다. 모두가 비논리로 점철되어 있었다. 뺨이 칼로 난자당한 것처럼 화끈거렸다. 미술실을 나왔을땐 비가 내리고 있었다. 건물간의 간격이 꽤 떨어져 있기 때문에 교실로 돌아왔을 땐 온통 몸이 비에 젖었다. 청소 시간도 다 끝나고 학생들은 다 가고 없었다. 미술 선생에게 맞은 얼굴이 무척 아팠다. 타오르는 것 같은 통증으로 미루어 흉하게 부어올랐을 것이 분명했다. 나는 빠르게 걸어 교문 입구에 다다랐다. 대기하고 있어야 할 기사는 이미 떠난 후였다. 시간을 너무 지체 했으므로 당연했다. 학교는 번화가와 거리가 떨어져 있기 때문에 하교 시간이 끝나고 나면 사람이 뜸했다. 정주한의 집으로 가야했다. 그러나 가고 싶지 않았다. 온화한 어머니의 얼굴과 무관심한 새아버지의 얼굴이 자꾸만 겹쳐졌다. 그리고 자신의 방을 지배하는 정주한. 여기서 시외로 가는 버스를 타면 멀리 갈 수 있었다. 결정을 못하고 정류장에서 서있는데 앞으로 차가 한 대 섰다. 검은 세단 창이 열리고 기사 얼굴이 보였다. “타세요.” “... 버스타고 가도 되요.” “일부로 왔으니 타세요.” 그가 차에서 내려 나를 뒷좌석에 태웠다. 차 안에선 창이 물방울들로 어룽져 있어 바깥이 잘 보이지 않았다. 기사는 정확히 뒷문에 차를 세워주었다. 뒤로 난 뜰을 통과할 때 나는 저번에 가방을 버린 쓰레기통을 보았다. 뚜껑을 열었지만 안이 텅 비어 있었다. 빗물에 흠뻑 젖은채로 이 층 방으로 가자 정주한이 게임을 하면서 앉아있었다. 총으로 사람을 죽이는 게임이었다. 난사되는 총소리가 시끄러웠다. 그는 내게 등을 보이고 있었다. 온 몸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 직접 데리러까지 가주고, 좋지?” 그가 세 명을 한꺼번에 총으로 쐈다. 피를 토하며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그들의 비명은 고통스러웠다. “집에 전화 좀 할게.” “안해도 돼. 내가 먼저 했으니까. 아주 좋아하시던데.” “......” “저녁 늦게까지 공부하다 간다고 했어.” “.....” “너희 아버지가 친하게 지내라고 하셨지. 한 번 친하게 지내 보자구.” 그의 단단한 등을 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그의 얼굴을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서라운드로 그가 총질하는 소리가 내부를 쾅쾅 울렸다. 그 소리에 나도 모르게 한발씩 물러났다. 문을 열고 나가려고 하는 찰나 정주한이 나를 향해 게임스틱을 집어던졌다. 바로옆 벽에 맞고 바닥에 떨어진 스틱이 한 번에 산산조각났다. 나뒹구는 부품들을 밟으면서 그가 가까이 다가왔다. 문을 열려고 하는데 손잡이를 잡는 손이 미끄러졌다. 그는 소파 쪽으로 나를 잡아 당겨 바닥에 밀어넘어트렸다. 힘에서 밀리고 그 한계를 체감하는 일은 이제 지겨웠다. 그는 나를 무릎 꿇렸다. 수갑만 채워져 있지 않을 뿐 죄수나 다름없이 다뤄지고 있었다. 정주한은 내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머리를 비틀어 빼자 그가 얼굴을 바로잡았다. 아까 미술선생에게 맞은 동일한 부분에 길다란 손가락이 닿았다. 무의식적으로 신음이 나왔다. 닿기만 해도 얼굴이 뜯기는 것 같았다. 나는 얼굴을 감싸쥐었다. 화로에 댄 듯 얼굴이 뜨거웠다. 방 안 공기가 탁했다. 기침을 하지 않기 위해 입을 가리는데 정주한은 그것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나는 그의 눈에서 살의를 봤다. 몇 주간 원탁 상에 둘러 앉아 수학공식을 풀던 것은 아득한 일이 되어버렸다. “곧 선생님 오실 거야.” 내가 겨우 꺼낸 말은 그것뿐이었다. “안와. 그 새낀, 내가 짤랐어.” 그는 소파에 앉아 다리를 벌리고 내 머리통을 끌어다 자신의 페니스 쪽에 갖다대게 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김수영이 이야기했을까. 부정할 수 없는 카드만 꽂아 넣는 그의 손끝을 떠올렸다. 그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무엇이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인지를. 그가 그린 그림의 주인공은 분명 나였다. 정주한의 집이라면 구역질이 났다. 당장 벗어나고 싶은 생각 뿐이었다. 나는 그의 손을 물어 뜯었다. 정주한은 아픈 기색조차 없이 형벌을 내리는 것처럼 날 내려다 보고 있을 뿐이었다. 섬세하게 박혀있는 눈썹이 일그러졌다. 그가 때리지 않았음에도 코피가 몇 방울 툭툭 흘렀다. 불안이 내 코피를 터트렸다. 손등으로 피를 닦아냈다. 채희연의 입술에 얼룩져 있던 것처럼 엷은 핑크빛이었다. 나는 고개를 떨궜다. “왜-? 갑자기 무서워?” 오랜 동안 폭력은 나의 환각이었다. 고통을 멈추고 싶을 때 내가 제시할 수 있는 카드는 S의 밑에 힘없이 깔리는 것이 전부였다. 무릎으로 기어 가까이 다가갔다. 몸이 떨렸다. 그가 지퍼를 내렸다. 지퍼가 내려가는 소리, 천이 서걱이는 소리. 이 방의 모든 것은 소리로 지배되고 있었다. 나는 환각에 젖은 듯 나는 그의 하복부에 얼굴을 묻었다. S의 방에서 하던 것처럼 나는 브리프 위로 정주한의 페니스를 핥았다. 침이 말라 입이 건조했다. 눈 앞이 온통 회색빛이었다. 나는 차차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잊었다. 몸은 옷을 걸치고 있으나 벗고 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는 내가 철저히 파괴되기를 원하고 있었다. 파괴 속에서 그가 얻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을텐데. 나는 애초 그가 질시할 만한 대상도 되지 못했다. 진짜 부유한 그는 그것을 몰랐다. 한참 만에 정적 속에서 그가 신음을 흘리며 사정했다. “개새끼.” 그는 나를 밀쳐냈다. 정주한은 욕실로 들어가버렸다. 방에 붙은 욕실에선 요란하게 물소리가 났다. 현기증이 일었다. 나는 그가 욕실로 가고 나서야 바닥 위에 정액을 뱉어냈다. 차마 다 뱉지 못한 것이 입술 아래로 흘러 내렸다. 식도까지 치받혀 올랐던 그의 성기 때문에 몇 번이고 잔기침을 했다. 무릎이 아렸다. 온통 쓰라린 것들 뿐이다. 그가 나올때까지 바닥에 얼굴을 처박은채 그렇게 있었다. 샤워를 마치고 나와 그는 커튼을 걷었다. 비가 그친 후의 여름 햇빛이 쏟아져 들어와 무릎을 꿇고 있는 나를 비췄다. 방을 희뿌옇게 떠돌아다니는 먼지들. 나는 고개를 처박은 채로 낮게 방 안을 탐색하는 먼지들에 시선을 두었다. “.... 일어나.” 교복바지엔 그 도시에서와 똑같이 정액방울이 튀어있었다. 그러나 더렵혀진 것은 아니다. 다만 반복했을 뿐이다. 가방을 집어드는데 벽에 걸린 거울에 내 모습이 비췄다. 힘없이 내리깐 눈빛은 굴욕이 아니라 관능에 가까웠다. 그는 창을 등지고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벗은 그의 매근한 상체에 검은 그림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는 묘하게 기분이 상한 얼굴이었다. “널 보면 기분 더러워.” 다음 순서는 폭력일까, 아니면 다시 한 번 쥐구멍을 찾아보라는 요구일까. 그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해할 수 없을만큼 깊은 숨이었다. 그는 손가락을 까닥했다. 가까이 오라는 신호였다. 나는 앞으로 발을 끌며 걸어갔다. 코앞까지 갔을때 그가 목에 손을 둘렀다. 채 마르지 않은 물기가 축축했다. 그는 갑작스럽게 키스를 퍼부었다. 심장 뛰는 소리와 함께 입 안으로 혀가 침범했다. 나는 입을 꽉 다물었다. 물어 뜯는 것 같은 키스. 피맛이 얽혀 들었다. 끔찍해. 창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강한 햇빛이 안구를 훑었다. 그는 나를 오래도록 놓지 않았다. 이런 순간의 폭발을 익히 알고 있다. 더 깊고 예리한 환멸을 남길 뿐이리라. 내가 태어난 D시에는 극장이 없었다. 버스를 타고 번화가로 나가야 큰 건물들과 철지난 영화들이 걸리곤 하는 상영관을 만날 수 있었다. 지방에 걸리는 영화 포스터는 도시와 다르다고 했다. 여자가 몸을 드러내고 있는 자극적인 포스터가 극장 입구 유리 아래 끼워져 있었다. 허름한 벽 뒤편에 발려진 성인영화 포스터, 사진 속의 여자의 벗은 가슴이 실제라도 되는 것처럼 친구들은 간절히 더듬고 있었다. 가족은 어머니와 나 단 둘뿐이었다. 태어난 도시였지만 부모님은 타 지역에서 이주해왔기 때문에 친척이나 친한 사람들은 없었다. 아주 어렸을 때 아버지가 떠나간 후로 어머니는 점점 더 폐쇄적이 되었다. 학교와 집 그리고 삭막하게까지 느껴지는 작은 마을이 내가 아는 세상의 전부였다. 별다른 저항 없이 나는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고 집에 돌아와 어머니가 올때까지 방에서 TV를 보다 잠드는 생활을 반복했다. 친구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마음을 터놓을 상대는 없었다. 마을에는 작은 교회가 있었다. 어머니는 신앙이 없었지만 가끔에 내가 가는 것을 허락했다. 또래의 친구는 하나도 없었다. 나보다 나이가 어린 아이들 서넛과 목사의 아들 딸 그리고 이제 머리가 커서 도시로 떠나려는 생각만 꽉 들어찬 고등학교 졸업반들이 있을 뿐이었다. 주말 저녁이면 교회 뒷마당에서 영화 상영이 있었다. 회벽에 빛을 쏴서 영화를 상영했다. 고전들이 전부였다. 이미 많은 마을들을 돌면서 닳고 닳은 기계는 뿌옇게 흐렸다. 금지된 장난/예수의 재림/혹성 탈출/ 블로뉴 숲의 여인들 등을 보았다. <블로뉴 숲의 여인들> 은 댄서의 전력을 가진 여자가 부잣집 남자와 신분을 속이고 사랑에 빠졌다가 파국을 맞는 내용이었다. 국어시간에 습득한 파국이란 단어가 잘 맞는 (모두가 지루해하는) 그 프랑스 흑백 영화를 나는 끝까지 보았다. 내 눈은 댄서인 다리에 알이 박힌 여자가 아니라 단정하게 검은 양복을 입고 음울하게 눈빛을 빛내는 남자 주인공을 쫓고 있었다. 장의 얼굴을 보며 흔히들 말하는 감수성이 움트는 것을 느꼈다. <블로뉴 숲의 여인들>을 볼 때면 나는 소녀였다. 상영의 맥이 끊어질 무렵 신학 대학교 졸업반이었던 S가 마을로 흘러들었다. 내가 고등학교에 막 입학했을 때였다. 그는 이십대 후반의 남자였다. 목사와 안면이 있는 사이로 신학대를 졸업하기 전에 한 번 외진 마을에서 봉사를 하고 싶다고 했다. 우리를 대하는 것이 봉사의 개념이라고...? 나는 약간 의문을 가졌지만 의문을 나눌 만한 상대가 없었다. 언제나 인자하게만 행동하는 목사는 허물없이 그를 일원에 끼워넣었고 불만으로 가득차 있던 고교 선배들은 모두 마을을 떠난 후였다. 기념촬영을 하는 촬영기사처럼 마을로 찾아든 그가 나는 금방 떠날 거라고 생각했다. 겨울이 가고 봄이 따뜻했다. 봄볕 아래 그는 도시에서 가져온 물건들을 풀어놓았다. S는 사람의 환심을 사는 법을 알았다. 먼저 아이들과 경계심을 푼 후 그는 내 눈 앞에 가방을 열었다. 학교 도서관에 앞권만 있고 뒷권은 없던 책들 그리고 음악들을 그는 갖고 있었다. 맥이 끊겼던 상영회도 다시 시작되었다. 도시의 친구로부터 만화영화를 소포로 받아 틀어주면 목사의 아이들과 동네 아이들이 좋아했다. 만화에 흠뻑 빠져 깔깔거리는 아이들. 나는 의자 가장 뒤에 앉아서 먼 곳을 보고 있었다. 그가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적당히 굵은 목 위로 선이 굵은 얼굴이 있었다. 그의 팔과 손등에 정맥이 툭툭 불거져 있었다. 마을에서 삼십대가 되지 않은 젊은 남자는 그가 유일했다. 그는 사람좋게 웃었다. 그의 웃음이 부끄러웠다. 만화영화를 상영하기 때문에 굳이 갈 필요가 없었음에도 나는 집에 홀로 있는 것보다 교회로 가는 것을 택했다. 신앙이 아니라 사람냄새가 그리울 때면 내가 아닌 사람들은 어떤 모양새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관찰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아이들에게 만화를 틀어놓고 그는 날 자신의 방으로 불렀다. S의 거처는 목사가 살고 있는 사택 한 쪽에 붙은 빈 방으로 낡긴 했지만 크고 넓었다. 책장에 책이 빼곡히 가득차 있었다. 나는 허락도 없이 무심결에 손가락으로 책을 짚었다. 그는 내가 짚은 책을 하나도 빼지 않고 뽑아 손에 쥐어주었다. 방에 걸린 그림들은 모사화였지만 하나같이 마음을 사로잡을만한 것들이었다. 한쪽이 나간 형광등, 그 방에서 <가면의 고백>의 뒷부분을 읽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두운데서 보면 눈 나빠져.’ 부드럽고 강한 그의 목소리. 그는 스탠드를 손수 꽂아 책 위에 대주었다. 불이 환했다. 눈이 아플만큼. ‘책을 좋아한다고 목사님이 그러시던데 정말이었구나?’ ‘......네.’ '어머니는 자주 늦게 오셔?' '야간 근무 하시는 날요. 일주일에 세 번 정도.' '그럼 혼자 밥 먹겠구나.' '네. 혼자...' S는 이미 내가 형제도 아버지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슴이 공연히 두근거렸다. 혼자 먹던 밥상이 떠올랐다. TV 볼륨을 크게 해놓고, 허겁지겁 식사를 해치웠다. 어머니가 신경쓰지 않은 날은 반찬이 싸늘하게 식어 그대로였다. 먹다 보면 한 귀퉁이에 곰팡이가 슬어있곤 하던 깻잎. 희고 푸른 곰팡이를 걷어내다가 밥상 위에 보자기를 덮곤 했다. '나도 막상 내려와 혼자 있으니 밥 먹을때마다 좀 그렇더라. 항상 목사님 댁에 신세를 질 수도 없고. 나랑 같이 밥 먹자. 혼자 먹으면 외롭잖아.' 그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번뜩였다. 긴장 때문에 책을 쥔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저기... 어떻게 이렇게 책이 많아요?' 내가 꺼낸 말은 엉뚱했다. '형이라고 불러도 돼.' '......' '형이라고 해 봐.' S가 흰 이를 드러내며 장난스레 웃었다. 내가 호칭을 망설였던 것은 일말의 경계심이었을까. 아니면 지독한 부끄러움 때문이었을까. 그는 손을 뻗어 뺨을 가볍게 쓸었다.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고 싶어하는 손짓이었다. '원하면 빌려줄 수 있어. 더 친해지면 줄 수도 있고.' '더... 친해지면?' 무의식적으로 그의 말을 되풀이했다. 그가 말하는 친해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때 나는 몰랐다. S는 신앙을 갖고 있던 갖고 있지 않던간에 균등하게 대했다. 마을 사람들에게 평판이 좋았다. 어머니가 야간 작업을 하는 날이면 나는 그의 방에서 책을 읽다 까무룩하게 잠드는 날도 생겼다. 그런 날들이 몇 번 반복되었다. 봄은 짧았다. 여름이 가까워지면서 날이 더워졌다. 방에서 책을 읽고 있으면 그는 음료수를 가져다 주었다. 그를 통해 아이스티를 처음 맛보았다. 처음엔 쓴 맛 뿐이었다. 그는 설탕이라면서 흰 가루를 섞었다. 컵을 쥐고 끝까지 마시면 기분이 몽롱해졌다. 처음 흡수하는 음료에 대한 이질감, 그것 때문에 황홀함이 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후에 알았지만 그가 섞은 것은 설탕이 아니라 수면제였다. 그 농도는 내 경계심이 허물어지는 것과 반비례여 점점 짙어졌다. 목사 부부가 도시로 여행을 떠난 날, 사택은 비워졌다. 교회에는 S와 나 뿐이었다. 저녁을 먹고 그는 만화영화말고 더 재밌는 것도 있다면서 내게 영화를 하나 골라보라고 했다. 나는 제목도 사진도 없는 검은 테입 하나를 집었다. 그는 그것을 재생시켰다. 테입을 보았다. 영화는 오프닝 크레딧도 없이 지직 거리다가 갑작스레 시작되었다. 여자들이 호텔 방 안으로 들어와 나신으로 탈바꿈했다. 그리고 이미 기다리고 있던 남자들과 신음을 지르며 나동그라졌다. 나는 그에게 비디오를 꺼달라고 말하지 못하고 그저 얼굴을 돌렸다. '... 왜 그래? 네가 골랐잖아.' 짖궂게 그는 계속 볼 것을 종용했다. '이런 건줄 몰랐어요.' 그가 비디오를 껐다. 이미 밤이 깊어 있었다. 가려고 하자 그는 만류했다. 혼자 컴컴한 숲길을 되짚어 가는 것이 무섭기도 했다. 그가 제공하는 모든 것을 나는 흡수해 왔다. 음악도 영화도 책도 음식도 그랬다. 그가 교회에 처음 나타난 이래로 내 눈은 그의 몸을 쫓았고 손은 그가 건네준 것들을 훑고 있었다. 그는 라디오를 켰다. 음악이 흘러나오자 팽팽했던 분위기가 조금 누그러졌다. S가 불을 껐다. 한쪽이 침침한 형광등이 한참만에야 꺼졌다. 커튼을 달지 않은 십자 모양으로 창살이 박힌 유리창 밖으로 달이 보였다. 오려낸 것처럼 가운데가 마구 잘려진 달. 구름 속으로 달이 얼굴을 숨겼다. 이 방에 홀로 누워 S는 달을 보며 잠이 들까. 나는 더 걸을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으로 방에 누웠다. 비디오 테입 때문이었을까. 다리에 피가 통하지 않고 몸이 유독 나른했다. '그만 잘게요.' 그가 대답없이 내 뒤에 바싹 붙었다. 바닥에 깔린 얇은 이불이 가볍게 밀렸다. 목덜미에 그의 숨이 닿았다. '은혁아.' 이름을 부르며 내 눈을 가리는 그의 손가락의 움직임은 유연했다. 발음이 또박 또박 이름을 짚었다. 내 이름이 아닌 듯 근사하게 들렸다. 한 손으로 눈을 가린채 그가 티셔츠 안으로 손을 넣었다. 저녁에 마신 음료가 핏줄을 타고 꿈틀대고 있는 것 같았다. 미친 듯이 심장이 뛰었다. 나는 몸을 움츠렸다. '형이라고 불러봐.' '......' 그는 한껏 몸을 붙여왔다. 허벅지와 팔이 탄탄했다. '어서.' 벗어나려하자 그가 허리에 두른 손에 꽉 힘을 주었다. 무기력하게 바지가 벗겨져 나갔다. 그는 브리프 안에 손을 넣었다. 아이스티를 타주던 그의 손. 물을 가르는 것처럼 움직이던 손가락이 순식간에 몸을 훑었다. 라디오에서 오페라가 흘러나왔다. 제목을 알 수 없는, 아름다운 곡조에 맞춰 한껏 고음으로 치닫는 교성에 가까운 소프라노였다. 오페라홀 VIP석에 앉아 나는 그 때 S의 방에서 나오던 음악이 마술피리의 밤의 여왕 아리아였음을 깨달았다. 오페라가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밤의 여왕이 왕자에게 사라스트로에게 빼앗긴 딸을 구출해달라고 부탁하는 부분이었다. 아리아가 끝날때까지 나는 얼굴을 들지 못했다. 그런 나를 연신 하품을 참던 정주한이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얼굴을 돌리지 않고 짐짓 관심없는 듯 곁눈질로 보았다. 오페라 공연 관람은 정주한의 열아홉 생일을 기념한 부모님들의 값진 선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간신히 인내하고 있을 뿐이었다. ‘친구’라는 명분으로 그와 나의 자리는 바로 옆이었다. 도무지 그와의 만남을 끊을 수 없었다. 가족 모임에도 동반으로 그는 계속 등장했다. 그는 외아들이었고 부모는 그가 항상 친구들과 잘 어울리도록 배려하는 것이 지상 최대의 과제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두 이복동생들은 항상 정주한에게 잘 보이고 싶어하는 기색이었다. 그러나 그녀들은 그의 사정권 안에 없었다. 동생들을 쭉 훑고는 괴수를 본 것처럼 왜 저렇게 생겼냐고 작게 뇌까렸다. 1막이 끝나고 화장실로 갔다. 화장실은 텅 비어 있었다. VIP석에 앉은 사람 숫자에 비해 터무니없이 넓고 컸다. 손을 씻고 나오는데 그가 입구에 서있었다. “간다고 해.” “....?” “아프다고 해. 네가 그러면 일찍 보내줄거야.” “오늘... 네 생일이잖아.” “부모님은 너랑 내가 제일 친한 줄 알아. 사실 아닌걸 알면서도 모른척 하는 거지. 다른 놈들은 영 맘에 안드니까.” “마술피리...” “제목 쯤 나도 알아. 십여번도 더 봤으니까. 우리 아버진 버전이 새로 나올때마다 이걸 보러오지. 푸치니 지겨워.” 푸치니가 아니라 모차르트였다. “... 난 처음 보는 거야.” “말 길게 하기 싫어. 그만 본다고 해.” “안돼.” “왜?” “... 엄마가 좋아해.” “엄마 엄마. 엄마가 좋아해? 계집애 같은...” 나는 그것이 함께 나가자는 제의임을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말을 끝내지 않은 그를 두고 오페라 홀로 들어가 버렸다. 그의 청을 거절했다. 돌아오지 않을줄 알았건만 그는 다시 돌아와서 공연을 끝까지 봤다. 앞줄에 앉은 부모들은 만족스러운지 공연 말미에 일어나서 박수까지 쳤다. 어머니는 마술피리를 보고 정말 감동을 받았을까. 단순히 즐거운척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것도 박수를 치지 않은것도 정주한과 나뿐이었다. 어머니의 귀에 걸린 진주귀걸이가 조명을 받아 빛을 발했다. 공연이 끝나고 별도로 마련된 입구에서 차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들만 따로 움지이는 통로가 마련되어 있는줄 예전엔 몰랐다. 백화점에서 근로자만 따로 움직이는 화물용 엘리베이터가 있듯 VIP석에서 공연을 보고 차를 타기 위해 기다리는 것도 가진자의 자리는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서비스의 일종으로 계속 밤의 여왕 아리아가 작은 소리로 메아리처럼 울려나오고 있었다. 이 아리아 아래서 나는 타인에게 처음 벗은 몸을 드러냈다. 창에서 달빛이 들어와 바닥에 창살 모양 그대로의 흔적을 새겼다. 나는 S를 피해 컴컴한 쪽으로 도망치려 했다. 그러나 그는 나를 놓치 않았다. 나를 움켜쥔 손에 금세 땀이 찼다. 입을 틀어막으면서 쉼없이 몸을 더듬어 왔다. 그의 손이 수십개가 되어 육체를 옭아매는 느낌이었다. 그가 요구한 ‘형’이 아니라 ‘엄마’ 소리가 절로 나왔다. 반경 1킬로 미터 내에는 교회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사위는 암흑일 것이다. 어머니와 나의 세계에서 S와 나의 세계로 변질되었다. 개가 흘레를 붙는 것처럼 그는 나의 엉덩이를 한껏 처들게 했다. 나는 필사적으로 무언가 쥐려고 손을 뻗었으나 잡히는 것이 없었다. 라디오에서 흐르던 밤의 아리아가 뚝 멎었다. 죽음과 같은 정적. 나는 고통과 자극에 들떠 신음을 흘렸다. 달빛을 받아 에메랄드색으로 보이는 장판에 내가 남긴 무수한 손톱자국이 찍혀 있었다. S가 울먹이는 내 귀에 속삭인 것은 지난 주에 배운 성경구절이었다. ‘하나님이 나를 경건치 않은 자에게 붙이시며 악인의 손에 던지셨구나. 내가 평안하더니 그가 나를 꺾으시며 내 목을 잡아던져 나를 부숴뜨리시며 나를 세워 과녁을 삼으시고 그 살로 나를 사방으로 쏘아 인정 없이 내 허리를 뚫고 내 쓸개로 땅에 흘러나오게 하시는구나. 그가 나를 꺾고 다시 꺾고 용사 같이 내게 달려드시니 내가 굵은 베를 꿰어매어 내 피부에 덮고 내 뿔을 티끌에 더럽혔구나. 내 얼굴은 울음으로 붉었고 내 눈꺼풀에는 죽음의 그늘이 있구나. 그러나 내 손에는 포학이 없고 나의 기도는 정결하니라.’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귀를 손으로 틀어막았다. 그 구절은 내부에 잠재하고 있었다. 고급스런 천장 어딘가에 도사리고 있을 스피커를 부수고 싶었다. 나는 벽 쪽으로 붙어섰다. 정주한은 귀여운 외아들 노릇을 하기 위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의 뚜렷하게 날이 선 이목구비, 파고들만한 허점을 하나도 찾을 수 없는 외형. 그는 어떤 때는 논리적으로 그리고 때때로 어리광을 피우면서 얼굴에 미소를 가득 띄우고 부모님을 대했다. 분명 가짜가 아니었다. 새아버지가 다가왔기 때문에 나는 귀에서 손을 내렸다. 그는 오페라 씨디를 몇 장 들고 와 정주한에게 건넸다. 그렇게 듣기 싫다는 마술피리 씨디를 그는 소유하게 되었다. 나만 눈치챌 수 있을 정도의 몇 초간 일그러지는 그의 표정. 공을 들여 적용시킨 수학공식이 어그러져 답이 전혀 엉뚱하게 났을때 그는 그런 표정을 지었다. 멍청이라고 머리를 쥐어박으려 드는 과외선생에게 으르렁거릴때도 그런 얼굴이었다. 표정과 다르게 그는 정중하게 감사를 표했다. 오페라 공연이 끝났지만 아직 아홉시밖에 되지 않았다. 정주한의 친한 친구라는 명목으로 나는 그의 생일파티에 함께 가야했다. 새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그의 부모들은 재밌게 놀고 오라면서 차를 대주었다. 헤어지기 전 어머니의 귀걸이에 걸린 몇가닥의 머리카락을 빼주었다. 고마워. 어머니는 나를 끌어 안아주었다. D시에서 아침마다 맞이하던 노동의 냄새는 이제 어머니를 지배하지 않았다. 자포자기 상태로 그의 차에 밀어넣어졌다. 사생대회 날 정주한의 집으로 나를 데리고 가기 위해 왔던 그 기사였다. 우리 사이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그는 별 말 하지 않고 백미러로 지시를 기다릴 뿐이었다. 정주한은 타자마자 씨디를 나에게 던져버렸다. “마술피리는 빌어먹을.” 그는 적잖이 나를 원망하는 기색이었다. “옷이 그것밖에 없어?” “........” “맨날 그 옷이잖아. 같이 다니기 쪽팔려.” 교복이 아니고는 항상 비슷한 옷이긴 했다. 물론 같은 옷은 아니었다. 단색의 반팔셔츠 비슷비슷한 패턴의 바지가 전부인터라 비슷하게 보일 뿐이겠지. 대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역에서 내려줘.” “뭐?” “네 말대로 정말 머리가 아파. 가고 싶지 않으니까 적당히 내려줘.” 그는 대꾸하지 않고 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인터레어가 하나같이 독특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었다면 거기에 현혹되어 바라보고 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주한의 눈동자는 아무 감흥이 없었다. 무심하게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 당장 꺼져버려. 그 말을 기대했다. 과격하게 차문을 밀어젖히고 인도 쪽으로 나를 밀어 떨어트려주기를. 그러나 꽉 다문 입술은 조금 불만스레 휘어져 있을뿐 열릴 기미가 없었다. 숍이 나열되어 있는 대로변까지 왔을때, 앞좌석을 놔두고 뒷좌석에 한 여자가 탔다. 더운 기운이 일시적으로 들어왔다가 맹렬히 가동되고 있는 에어콘으로 인해 사그러들었다. 채희연이었다. “반가워~~” 그녀는 나를 타넘어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그리곤 거리낌없이 우리 둘 다를 번갈아 끌어안았다. “나 알면서 왜 인사 안해. 우리 그 때 뽀뽀도 하고 재밌었는데. 그치? 갑자기 왜 갔어. 그 날은?” “......” 횃대에 앉아 새가 지저귀는 것 같은 소리였다. 술기운 때문이 아니라 팔짱을 끼는 것도 금방이라도 키스할것처럼 얼굴을 갖다대는 것도 평소 성격인 모양이었다. “아는 사이야?” 정주한이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 친해. 주한아. 근데 나 너 선물 못샀는데.” “필요 없어.” “늙은이같이. 갖고 싶은 거 열 가지만 적어. 내가 다다다 사줄게.” 정말 사줄 기세였다. 정주한은 이제 창밖 보는 것에서 시선을 거뒀다. 내려달라고 말하려는데 희연은 핸드백에서 사탕을 꺼내 입에 물려주었다. “근데 진짜 친하구나. 수영이도 따로 오던데 차도 같이 타고 가고. 그치?” “친하긴. 씨발.” 희연은 주한의 입에도 사탕을 박아넣었다. 바보야 상스럽게. 그녀는 애교있게 눈을 흘겼다. 둘은 외사촌 사이라고 했다. 채희연은 그를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같이 다니는 놈들도 그렇지 못했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두려움 따위의 감정은 타고나지 못한 사람 같았다. 그저 그녀 안에 충만한 것은 즐거움과 활기 뿐이다. 나는 사탕을 말없이 먹었다. “뭐 봤어? 오늘?” “마/술/피/리.” 부루퉁하면서도 대답은 잊지 않았다. “외삼촌은 그거 너무 좋아하셔. 벌써 몇 번째야.” 채희연이 그 말을 꺼내자 정주한은 거봐, 거짓말 아니잖아 하는 듯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내 확인이 왜 필요한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눈을 마주보고 결코 수긍해주지 않았다. * 환락. 처음부터 나는 도드라지는 그림이었다. 어머니가 정주한과 친하게 지내라고 보내지만 않았다면 견디지 않았을 것이다. 시간은 채우고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으로 룸에 앉아있었다. 커다란 홀이 가운데 있었고 소파가 벽에 바짝 붙어 있어 유리문을 닫으면 밀폐된 공간이 몇 개고 생기게 만들어진 구조였다. 음료든 음식이든 마음대로 집어먹을 수 있었다. 희연이 수십개의 병 중 세 개를 선택해 섞는 것을 바라보았다. 섞일 수록 탁하지 않고 색이 투명하게 일었다. 능숙하게 섞은 잔을 받아들었다. 허기를 알고 있는 것처럼 크고 우묵한 잔에 푸른 색 음료가 가득 담겨 있었다. 마시면서 시계를 봤다. 차가 끊어지기 전에 집을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의 파티에 초대된 이들은 누구를 보든 위아래로 훑었다. 낯선 얼굴을 보면 일단 경계 먼저였다. 그것도 아니라면 여자를 끼고 앉아서 쳐다보지도 않았다. 선물 전달식이 이어진 후 각자 흩어져 놀았다. 집에 가고 싶어를 몇 번이나 중얼거리면서 나는 소파 구석에 앉아있었다. 대체 저 자식을 왜 데려왔냐는 정상호의 물음에 주한은 무신경하게 손사래를 쳤다. 소파에 머리를 기대고 천장을 올려다 봤다. 소파는 차갑고 푹신했다. 천장에 형이상학적으로 얽힌 무늬가 촘촘히 박혀 있었다. 유심히 바라보니 덧칠한 흔적이 눈에 들어왔다. 조명이 거미줄처럼 천장을 더듬었다. 새겨져 있는 동물 숫자와 종류를 가늠하고 있으니 시간이 잘 갔다. 점점 음악에 귀가 먹먹해져 간다고 느낄 즈음 멀리 있던 김중규가 다가와 옆에 앉았다. 그는 내 잔에 재를 털었다. 액체 위에 담뱃재가 녹아 들어갔다. “주한이한테 불려 갔다길래 다리 하나는 부러져서 나돌아다니지 못할 줄 알았는데. 이젠 같이 차를 타고 오질 않나.” “......” 날벌레가 꼬이는 것처럼 케잌을 가지고 장난 치던 놈들이 하나둘씩 주위에 둘러앉았다. 테이블이 이 곳밖에 없는것도 아닐텐데 심상찮은 분위기를 감지한 것처럼 느긋하게 다가와 소파에 엉덩이를 붙였다. “끌고 오지도 않았는데 제 발로 나타난 건 뭐며 길길이 뛰어 짓밟아도 시원찮은 판에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거야. 거슬리게 말야.” 김중규는 이죽거리면서 내 어깨에 팔을 둘렀다. 실내엔 추울만큼 에어컨이 가동되고 있는데 그에게선 땀냄새가 났다. 내 몸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과외하는 동안 뭔가 배운 모양이지.” “뭘 배웠는데. 좀 더 효과적으로 기어오르는 법?” “그만해라.” 멀찍이 정주한이 다가와서 앉았다. 대각선이었다. 그의 셔츠와 목덜미에 생크림이 묻어있었다. “너 이상해. 혹시 장유미 뚫었냐? 해봤는데 걸레든? 그래서 흥미가 싹 식어서 온화한 마음이 드는거야 뭐야.” “더 떠들면 쫓아버린다.” 정주한은 자조적으로 말하며 앞에 놓인 술을 마셨다. 그의 곁에 있던 놈 하나가 캡슐로 된 알약을 쥐어주고 있었다. 저 약은 뭘까. 수면제는 아니고 최음제 정도 될까. “정주한, 의리없는 자식. 가면 이 새끼가 골로 가야지 내가 왜 가.” “좋은 날 왜 그러냐.” 정상호가 팔을 잡자 김중규는 거칠게 뿌리쳤다. 그는 눈을 부라렸다. 병이라도 깨서 후려칠 기세였다. 물론 정주한이 아니라 나를 후려칠 것이다. “그럼 부모들이 데려가라는데 어쩌라고.” 무신경하고 마마보이같은 발언, 말해놓고 스스로 치기를 드러낸 것 같아 그는 일순 뜨끔한 얼굴이었다. “새끼가 테이블에 포크 던졌을때부터 고자로 만들어버렸어야 됐어. 그럼 무서워서 소파가 아니라 테이블 아래 엎드려 있었을텐데.” 그는 피우던 담배를 테이블 아래 있는 내 손등에 대고 비벼껐다. 순간적인 화상은 통증도 느끼지 못하게 했다. 자국만이 남을 뿐이었다. 소리 지를 찰나를 놓쳤다. 이를 악무는데 김중규가 바지 앞쪽을 더듬었다. 잡으면 잘라버리겠다는 듯 난폭한 움직임이었다. “죽이기라도 하려고?” 김수영이 입을 열었다. “죽으면 재미없어. 머리통 깨진 시체 갖고 놀수도 없잖아. 확실히 역하더라고.” 그들이 낄낄 웃었다. 무슨 의미인지 알고 웃었다. 사람이 괴롭힘에 못이겨 뛰어내려 자살을 하고 발견하고 그 깨진 머리통과 흘러내린 뇌수를 보면서 더 이상 갖고 놀 수 없게 되었음을 또 한 번 조롱했다. “이십 오분 남았어.” 나는 김중규가 손등에 남긴 담배로 지진 자국에 컵바닥을 댔다. 손등에 미세한 경련을 일었다. “뭐?” “아니, 이십 오분 후에 가려고 했는데 지금 가야겠어. 더 이상 상대해줄 시간이 없어.” 내가 일어나자 김중규가 팔을 확 잡아당겼다. 몸이 휘청거렸다. 낄낄대던 분위기가 한꺼번에 싸해졌지만 집중하는 것은 김수영이나 정주한 정도였다. 이미 정상호는 다른 자리로 건너가 여자를 엎어놓고 뭔가를 하고 있었다. 호기라도 부리냐는 듯이 김중규가 나를 도로 옆에 앉혔다. 정주한은 분명 이쪽을 필사적으로 보고 있을 것이다. 그 감정이 무엇이든 간에 나는 얼굴을 돌리지 않았다.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넌 정말 총살감이야. 기둥에 매달아 놓고 총으로 쏴죽였으면 딱 좋겠어.” 이상했다. 정주한의 방에서 그의 폭력 앞에서 절로 그의 무릎안으로 기어갔었다. 그러나 김중규의 뒤틀린 살의를 목도하면서도 나는 무릎꿇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는 나에게 공포도 무엇도 아니었다. 나에 대한 증오가 어디서 시작되었던 간에, 김중규는 다만 주먹을 뻗어 날 죽여놓고 싶을 뿐이었다. “또 말리면 너희도 죽일 거야. 이십 오분? 이 개새끼야. 십분으로도 족해.” 김수영이 룸을 나갔다. 그는 나가면서 유리문을 닫았다. 불투명한 유리 뒤에 붙어 지키고 있는 김수영의 실루엣이 보였다.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그 앞에 버티고 있을 것이다. “넌 안 나가? 그럼 구경해. 그것도 괜찮지.” 김중규가 시계를 풀어 내 눈앞에 들이밀었다. 시간을 똑똑히 보라는 의미였다. 룸이 어두워 분침이 보이지 않았다. 다만 정주한 패거리들이 같은 시계를 착용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여기서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이던간에 내분이 될 터였다. 김중규가 나를 몇 대 후려치자 절로 얼굴이 돌아가 정주한이 보였다. 그는 소파에 앉은채로 복잡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복잡한 것은 그와 어울리지 않았다. 나는 비린내나는 전학생이고 싹을 잘라버리고 싶은 피해자에 불과하면 되었다. 주먹은 장전된 총알 같았다. 한 대씩 얼굴을 때릴 때마다 총이 발사되는 듯 했다. 내 몸이 이 곳 저 곳에 부딪히면서 소음이 일었다. 탕 탕 탕. 너를 매달아 놓고 총으로 쏴죽이고 싶어. 특히 그 얼굴을. 그는 얼굴만 집중적으로 난타했다. 웅크리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그의 발끝이 울대를 건드렸을때 나는 울컥해서 입을 손으로 가렸다. “십분 지났어.” 정주한의 목소리에 충직한 개처럼 숨을 몰아쉬면서 김중규는 발길질을 멈췄다. 입에서 피가 나왔다. 목구멍에서 흘러나와 타액과 섞인 핏물이 따뜻했다. 계속 손으로 만지고 싶은 괴이함이 일었다. 김수영이 유리문을 열자 김중규가 나갔다. 음악소리와 함성들 그리고 여자들의 얄팍한 웃음이 한데 섞여 귀에 웅웅거렸다. 자꾸 밤의 아리아처럼 들렸다. 교성, 신음소리들. 나는 정주한을 두고 룸을 나갔다. 출구를 찾아야했다. 처음 들어온 출구를. 분명 무대 중앙이 있고 그 옆으로 세 번째 문이었다. 묵직한 문을 밀어 젖혔다. 얻어맞았기 때문일까. 열고 닫는데만도 힘이 딸렸다. 출구를 찾는 것에 있어서는 영 젬병인 모양이었다. 눈 앞에 드러난 것은 탁 트인 도로가 아니라 쓰레기통과 봉투 그리고 빈병이 쌓여있는 빈터였다. 뒤로 나왔나...? 나는 바닥에 깔린 박스 위에 앉았다. 학교 창고에서처럼 눈 앞의 벽이 피에 얽혀 있는 것 같이 홍색으로 보였다. 쓰레기 냄새가 역하게 일었지만 클럽 안에 비하면 견딜만 했다. 나는 바닥에 침을 뱉었다. 핏물이 길게 따라 나와 바닥에 뚝 뚝 흔적을 남겼다. 아픔을 물리치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더듬이가 긴 벌레가 먹이를 찾기 위해 기어다니고 있는 것이 보였다. 벌레는 쓰레기를 더듬고 탐색했다. 쓰레기통과 빈병 입구를 드나드는 벌레 수는 한 둘이 아니었다. 시커먼 것들이 꼬이고 있었다. 내 쪽으로도 기어오고 있었다. 소름이 쭉 끼쳤다. 삼 일 학교를 결석한 것만으로도 어머니는 근심에 가득차 있었다. 나는 이불을 쓰고 누운채 미닫이 문 뒤에서 직장으로 가기 위해 거실에서 어머니가 분주하게 움직이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어머니는 학교에서 무슨 문제가 있었다고 결론을 내렸지만 시간이 없어 찾아갈 수 없었다. 나로써는 차라리 다행이었다. 아픈 것은 사실이었지만 어머니에게 보일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돌아누우려 하는데, 남자 목소리가 났다. 인사를 건네는 목소리. 미닫이문 뒤로 들리는 웅얼거림. 그가 채 몇 평 되지 않는 거실을 지나 내 방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몸이 마음을 따라가주지 않았다. 문이 반투명하기 때문에 움직임 따위는 금세 간파되었다. 미닫이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S가 방 안으로 성큼 들어왔다. ‘은혁아. 학교 결석했다면서?’ ‘.....’ ‘목사님한테 들었어.’ 앉은채 뒤로 물러나 벽에 붙었다. 포획되기 전 동물이 우리 끝에 숨는 것처럼 뻔히 보이는 움직임이었다. 엄마 다녀올게. 어머니의 목소리는 흐릿했다. 구두굽이 현관을 딛어 멀리 사라지는 소리, 곧이어 쾅 하고 문이 닫혔다. 문소리가 어머니와 나를 단절시켰다. S. 눈앞에 서있는 S.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의 손에는 내가 그토록 갖고 싶었던 책 몇 권이 들려있었다. 불안 속에서도 나는 그 책장을 펴고 싶었다. ‘며칠새 마른 것 같네.’ ‘......’ 그는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나를 대했다. 그는 가져온 쇼핑백 안에서 음식을 꺼냈다. ‘먹어. 네가 좋아하는 거잖아.’ ‘나중에 먹을테니까... 가세요.’ ‘나중은 없어. 안 먹으면 도로 가져갈거니까. 너말고도 좋아하는 애들은 많아.’ 그의 말투는 나를 훈계하는 것 같았다. 가당치 않은 어리광을 부리고 있다는 듯 거침없이 이불을 걷어냈다. 남루한 이불이 젖혀지고 반바지 아래 비죽 흰 다리가 드러났다. 그는 위에서 나를 보고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이 좁은 방 안에서 그는 나를 죽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가 음식을 펼쳤다. 냄새가 코를 찔렀다. 입맛을 자극하는 통속적인 냄새였다. 이걸 다 먹으면 그가 갈까. 나는 그가 강제로 먹이기 전에 서둘러 가져온 음식을 입에 넣었었다. 씹고 있는 음식이 독처럼 느껴졌다. 씹을 수록 목으로 넘어가지 않고 점점 더 질겨졌다. 혀를 씹어 삼키려고 애쓰는 느낌이었다. 그가 건네주는 물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나는 머리를 숙인채 끝까지 다 먹었다. 한참만에야 그릇이 빈 바닥을 드러냈다. ‘보고 싶었어.’ 그가 내 방에 온 것은 처음이었다. 어머니가 아닌 타인의 방문 역시 목사를 제외하곤 처음이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오래전에 연고를 끊고 숨어들었기 때문에 친척들은 전혀 없었다. 아버지가 떠난 후로 어머니와 나의 집에 방문객은 없었다. 낡은 건물에는 팜플렛 한 장 판매원 하나 드나들지 않았다. 그가 아래를 향한 내 얼굴을 빤히 보며 억지로 눈을 맞췄다. 유리알 너머로 속쌍꺼풀이 얇게 진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의 방에서 빠져나와 집까지 오는 내내 피가 쏟아졌다. 붉은 피가 속옷을 흰 변기를 가득 메웠다. 하혈하는 여자처럼, 입을 양 손으로 틀어막은채 무섭게 밤을 보냈다. 휴지를 몇 장이나 버리고도 허벅지에 피가 얇은 막으로 달라붙었다. ‘... 그만 가세요.’ ‘왜?’ ‘그냥...' 무서워요. 그 말을 삼켰다. ‘외로워서 그랬어.’ S는 그림처럼 단정한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교회 강단에서 처음으로 보던 얼굴. 나는 점점 더 벽으로 붙었다. 외로움. 그 단어는 본능적이었다. 외로움에 젖어 그에게 마음을 열고 많은 것을 이야기했다. 아버지가 떠나고 난 뒤의 공허와 우울함. 어머니와 나를 지탱하고 있는 것은 허름한 건물의 벽돌이 아니라 벽돌처럼 묵직한 허무라고.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호응해주는 S의 존재 자체가 의미였다. 외로워서. 외로워서. 외로워서. 그는 가져온 책을 내게 주었다. ‘너 줄게. 전부 다. 우리 친해진거야.’ 선천적으로 S는 내가 원하는 것과 두려워하는 것을 간파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전지전능. 교회에서도 신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한 나를 그가 새로 지배하는 느낌이었다. 나는 책을 품에 안았다. 성급하게 책장을 넘기다가 손을 벴다. 아름답고 인상적인 구절이 가득 쓰여있을 양장본은 빳빳한 칼날 같았다. 그가 머리를 쓰다듬었다. 분명한 욕정이 배어있는 손길이었다. ‘옆으로 누워봐.’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그는 내 거부를 받아주지 않았다. 주눅이 들어 옆으로 누웠다. 그는 나를 조율하기 시작했다. 십 년 넘게 자라온 방인데도 코 앞 벽지 무늬가 낯설다. 미끄러운 바닥에 뺨이 납작하게 닿았다. 그는 내 허리름 더듬고 티셔츠 안의 척추뼈를 손바닥으로 짚었다. 피로함. 나는 눈을 꽉 감았다. 목구멍이 피로로 가득찼다. S가 길고 능숙한 손가락으로 내 가장 약한 상처를 희롱했다. 점자를 읽어내려가듯 더듬으며 그는 약을 바른 손가락을 더 깊숙하게 넣었다. 고통에 아랫배가 가쁘게 호흡했다. 나는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S는 내게 음란하다 했다. 음란함이 수십개의 칼날로 뱃속에 도사리고 있다고-. 그 칼에 도려내지는 것은 자신이라고 말하며 마음껏 나를 범했다. 이런 행위가 사랑이 아니라면 자살할 수밖에 없었다. 김수영은 언제 따라 나왔을까. 생각에 빠져들면 꼭 필름이 끊어진 것처럼 곁에 누가 서있는지를 잊을 때가 많았다. 그가 흰 손수건을 갖다 대주었다. 나는 피를 닦았다. 그가 담배를 꺼내 피웠다. 연기가 독했다. 독한 것이 차라리 견디기 쉬웠다. “비위 맞춰주려 따라온 거 아냐?” 딱히 비꼬는 어조는 아니었다. 김수영은 항상 뭔가 알고 있는 것처럼 나를 보았다. 자신의 눈빛이 뭘 의미하는지 맞춰보라는 듯한 얼굴이었다. 표정 후엔 무언가 발언할 것이다. “여긴 의외로 좁은 동네야.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아는 사람들끼리만 알고 지내지.” “.....” “여기 온 것부터가 잘못이지. 넌 사람을 자극하거든." "그만둬. 듣고싶지 않아." "애들이 장유미한테 목매는 것도 한 마디로 미지의 영역이라 그런거지. 별로 특별한 의미가 있는 건 아냐. 어디든 한 번씩 발을 딛으면 발자국이 남잖아. 발자국을 남기면서 쭉 걸어가는거지. 애들은 거의 다 돌려사귀니까 남은 영역이 그 뿐이라...” “......” “조금만 생각해봐도 이상하잖아. 이 동네에서 태어난 애들은 뻔한데 너 정도 얼굴이었으면 진작 눈에 들어왔을텐데. 불쑥 전학생이란 것도 그렇고.” “......” “정주한 그 자식은 의외로 순진하지. 아직도 네가 부잣집 아들이라고 믿고 있으니.” 김수영의 말투에선 진한 애정이 묻어났다. 둘은 어렸을때부터 친구라고 들었다. 한 곳에서 자라고 한 곳을 향해서 걸어가는. 어디까지 짚어보고 어디까지 감지하고 있을까. 오후 내내 S에게 묶여있던 내 머릿속을 그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사실 넌 장유미를 좋아하지 않는게 아니라 좋아할 수 없는거잖야. 불능이지.” 내게 동의를 구하는 것일까. 입에 재갈이 물려져 있었다. 김수영은 단어의 조합으로 내 입에 재갈을 물렸다. 묵직하게 아팠다. 입을 벌릴 수도 다물수도 없었다. 그는 자기가 건네준 손수건을 거둬갔다. 그리고 먹이를 주어 잠재우듯 벌레들이 기어오르고 있는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전에 살던 곳은 어디었어?” 그의 질문에 나는 순순히 지명을 말했다. 학교에서 한자로 지명을 풀이해 반복해서 가르쳤다. 학교 이름도 지명과 동일했다. 언젠가 이 곳이 아닌 다른 세계 때문에 폐교가 될 지도 모를 이름이었다. 여길 떠나더라도 꼭 이 곳을 기억해야 한다- 도시로 발령받기만을 손꼽고 있는 교사들은 교육부 지침에 따라 그렇게 가르쳤다. 김수영은 손으로 내 어깨 부근을 가리켰다. 더듬어보니 옷 일부가 찢겨 어깨가 드러나있었다. 김수영은 가까이 다가와 틈을 자신의 손으로 덮었다. 그의 손을 차가웠다. 더위가 클럽 뒤를 지배하고 있었지만 그런 기운에서 그는 예외였다. 무언가에 시달리고 애원하는 것에서도 그는 예외였다. 내가 도시에서 만난 이들은 모두 몇 가지 특성만을 골라 지니고 있었다. 어머니 또한 그렇게 변모해갔다. 그의 흰 피부가 어둠 속에서 또렷이 빛났다. 그가 눈은 그대로 두고 입만 벌려 미소 지었다. “공교롭게도 새아버지랑 성이 같아서 너한텐 행운이지. 여러모로.” “......” “애들한테 얘기할까? 그럼 더 이상 괴롭히지도 않을 거야. 어때?” 맨홀 뚜껑이 열려있었다. 뚜껑은 한 쪽으로 치워져 있고 사람 하나 쯤은 너끈히 빠질 수 있을 것 같은 깊이 안으로 검은 하수가 흘러가고 있었다. 정주한은 손에 내내 쥐고 있던 약을 맨홀에 버렸다. 그가 던진 몇 알의 캡슐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가끔 넋놓고 바라보게 되는 것들이 있었다. 지금은 검은 하수였다. 정주한 곁에 바짝 붙어 허리에 손을 감고 있는 여자는 나를 신기하다는 듯 보았다. 마치 이젠 셋이 하는 거야? 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나는 내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그의 태도는 내내 신경질적이었다. “타.” “버스 타고 가도 돼.” “지금 새벽 세 시야.” “그럼 택시...” “타라면 타.” 기사가 적어도 열 개는 되보이는 쇼핑백을 트렁크에 구겨 실었다. 거리엔 사람도 차도 보이지 않았다. 워낙 외진 장소에 있긴 하지만 차 헤드라이트를 제외하곤 어둠 뿐이었다. 어두운 것은 조금 무서웠다. 무서움은 홀로 캄캄한 곳에 서있을 수록 점점 더 증폭되리라.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었다. 두 개의 방을 터서 만든 호텔 룸에는 정주한의 방에 있던 것과 똑같은 자색 소파가 있었다. 테이블에 금장이 박힌 시계가 있었다. 새벽 한 시에 불과했다. 정주한은 나에게 시간을 속였다. 그는 여자를 침대 위에 밀어넘어트렸다. 나는 선채로 어정쩡하게 그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보라고 데려온 것이 분명했다. 자신을 보라고. 벗은 여자의 뒷테는 장유미를 연상시켰다. 검고 긴 생머리가 허리 굴곡을 덮고 엉덩이골에 살짝 닿았다. 방 안을 가득 메우는 것은 열기였다. 어둠 속에서 정주한이 틈틈이 내뱉는 탁한 신음소리가 그의 흥분을 증명했다. 힘이 넘치고 생기가 있었다. 그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허리에 다리를 감는 여자를 침대에 깔아 눕히고 고개를 처들어 내 쪽을 보았다. 거리가 있었으나 그의 자신만만한 얼굴이 보였다. 삽입하는 내내 난 너 같은 호모새끼가 아냐 빨리 긍정해 그 눈은 그렇게 요구하고 있었다. 여자의 적극적인 애무, 그녀의 젖가슴을 터져라 쥐면서 정주한은 내 얼굴을 목덜미를 손끝을 훑고 또 훑었다. 밤새 소파 아래 웅크리고 누워 있었다. 어깨가 아파 절로 눈이 떠졌다. 욕실에 가서 얼굴을 씼었다. 생각보다 얼굴은 별로 붓지 않았다. 맞는 것에도 내성이 있는 모양이었다. 피부 이곳저곳 그의 반지에 긁혀 붉은 상처가 있었다. 고양이가 할퀴어 놓은 것 같았다. 시계를 맞춰 갖고 있다면 반지까지 나눠끼지는 않았을까. 내가 얼굴을 씻는 동안 어느새 그가 욕실 입구로 다가와 있었다. 호텔 물줄기가 세서 가슴팍까지 물에 흠뻑 젖었다. 바깥으로 나오자 그는 한 구석에 있던 쇼핑백들을 부주의하게 던져주었다. 무릎에 맞고 바닥에 넘어진 쇼핑백에서 선물들이 줄줄 미끄러져 내려왔다. 그는 내게 그것을 뜯으라고 시켰다. 번잡스런 포장들을 걷어내자 현금이 통째로 들어있기도 했고 문화상품권이 백만원 단위로 채워져 있었다. 이복 동생들의 방에서 몇 번 본 적 있던 것들을 나는 차례로 뜯어 티테이블에 전시하듯 놓아주었다. 내가 한 번도 지녀본 적 없던 것들이었다. “갖고 싶은게 있으면 가져.” 나는 뒤로 한 발 물러섰다. “내가 왜?... 네 선물이잖아.” “한 번도 안가져 본 게 없어.” “.....” “설마 너도 그래?” 부정하지 않았다. 나는 눈을 내리깔고 새아버지의 아들 행세를 멈추지 않았다. 어젯밤 김수영의 조롱이 등줄기로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필요 없어. 나는 아무것도.” “왜?” “의미가 없으니까.” “내가 주는 거라서?” 정주한은 치닫는 중이었다. 물량 공세는, 그가 드러냈던 살의와 분명 끝이 닿아 있으리라. 호의던 애증이던 받아들이면 그에게 틈을 보이는 것이다. “그럼 뭘 갖고 싶은데?” 저 말은 어제 차 안에서 채희연도 했다. 몇 배는 더 강렬하게 사줄 기세였다. 순간 내 머릿속엔 푸른 물이 차오른 수조가 떠올랐다. 몸을 담그면 머리까지 푹 잠기는 심해 같은 수조를. 그 안에 들어갈 수 있다면 더없이 안락할 것이다. 왜 갑자기 그게 떠올랐는지 몰랐다. 어이없는 상상에 나는 홀로 실소를 흘렸다. 그는 발치에 있던 옷의 포장을 뜯어냈다. “입어. 난 같은 디자인만 세벌이야.” 새 포장지를 원한다면... 나는 어깨 부분이 뜯어진 티셔츠를 끌어올렸다. 그의 시선이 배에 머문다. 신나 냄새가 난다며 손님방에서 무릎으로 짓이겼을때 생긴 멍이었다. 멍이 많이 흐려져 있었다. "어제... 중규가?“ “네가 저번에 손님방에서 그런 거잖아.” “아..” 말실수가 있었다. 손님방이 아니고 내 방이라고 해야 맞았다. 그러나 그는 그것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어젯밤처럼 내 몸을 훑었다. 교실 맨 앞자리까지 쫓아와 장유미의 편지를 찢던 애정은 전염병처럼 옮겨다니는 것일까. 사실 애정이라고 할수도 없었다. 그는 단지 나를 벗은 몸으로 세워두고 싶었을 뿐이었다. 정주한이 자기 미간을 쓸던 손을 뻗어왔다. 조금만 더 가까이하면 손가락 끝이 호흡하고 있는 내 배에 닿을 것 같았다. 나를 훑고 그 뒤엔 나를 품고, 내가 순서대로 따라주지 않으면 어떻게 할까. 그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그는 받지 않았다. 벨이 그칠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너 아직 나한테 생일 축하한다고 안했어.” 여자는 어디로 갔을까. 나는 눈을 돌렸다. 침대 위에 나신의 여자가 엎드려 있었다. 이불도 덮지 않고 누운 그녀의 엉덩이 밑으로 늘어진 체모가 보였다. 마른 팔을 푹신한 배게 한 쪽에 걸치고 편한 잠에 빠져있었다. 정사 후의 나른함, 밤은 분명히 지났다. “하루 지났잖아. 이제 네 생일 아니야.” 일요일이다. 일요일 정주한의 얼굴. 밤의 정사를 끝내고도 갈증이 이는 것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갈증을 풀어준다는 것은 그의 앞에 내가 엎드리는 것을 의미할까. 탐한다면 주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괴로운척 해도 어차피 표면을 핥고 있을 뿐이니까. 나는 갈수록 그에게 잔인한 마음이 되었다. 나는 그가 입으라는 옷을 입었다. 깨끗한 새 옷을 입은 나를 보고 어젯밤 룸에서처럼 그의 눈에 표정이 서렸다. 사념에 싸여 있었다. 그것을 감추려는 듯 그는 내게 등을 돌리고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어제... 룸에서 미안했어.” 블로뉴 숲의 그 남자가 떠올랐다. 여자에 대한 진실은 아무것도 모른채 청순하다고 올곧이 믿고 있던 남자, 부유하고 귀티나던 귓불, 석고를 붙여 말린 것 같이 매끈한 벗은 등. 자신의 믿음을 신앙으로 삼고 그것이 아니라면 깊은 좌절에 빠져 들었다. 블로뉴 숲을 걷던 그 여자는 어떻게 되었던가. 그것이 잘생각나지 않았다. * 어머니는 새아버지의 품에서 만족스러운 삶을 영위했다. 나는 그들의 방을 지날 때 가끔 한밤에 신음소리를 들었다. 어딘가 휘파람 소리를 연상시키는 가늘고 약한 음성이었다. 어머니는 그의 품에서 한 마리 고양이처럼 꼬리를 말았다. 과거 단 둘이 살 때의 우울한 기운은 이제 찾을 수 없었다. 어머니는 본래 친아버지와도 도시에서 만났고 우연히 시골에 흘러들게 되었을뿐 그 지역 사람이 아니었다. 사랑의 도피를 감행했으리라는 짐작 정도만 가능했다. 그러나 도피는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고 윤택하지도 않았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항상 신문을 읽고 있었다. 내가 장난으로 신문을 끌어당기면 짐짓 온화한 얼굴로 신문을 제 자리에 돌려놓곤 그게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안건들이라도 되는것처럼 몰입해 읽었다. 장난감도 없었고 맛있는 간식도 없었다. 어머니는 이웃들과도 전혀 사귀지 않고 집과 직장을 오갔을 뿐이었다. 아버지가 떠난 후에도 그것은 계속 이어졌다. 서있는 일을 할 때 어머니의 몸 전체에서 피로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럴때는 그저 조용히 내색하지 않고 구석에서 잠드는 것이 좋았다. 말을 걸면 마르고 긴 손가락을 휘저으며 돌아눕곤 했다. 한밤에 화장실이 가고 싶어 깨는 순간만이 어머니의 얼굴을 올곧이 관찰할 수 있는 기회였다. 꽉 감은 눈 아래로 아름답게 자라난 가지런한 속눈썹, 굴곡 없이 미간부터 수직으로 뻗은 콧날. 콧등은 반질하게 빛나고 있었다. 어머니의 흰 피부 아래 돋아있는 푸른 정맥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이제 나는 어머니의 침실에 들어가지 않는다. 새로운 수컷의 영역, 이 집 전체가 그렇지만 어머니는 완전히 새아버지의 영역으로 몸을 던졌다. 방학을 하고부터 집밖으로 거의 나가지 않았다. 대형 주택들이 운집한 곳이기 때문에 거리는 매우 조용했다. 창을 열어놓고 하루종일 수학문제를 풀고 영어를 외웠다. 외워도 머리에 남지 않는 것들은 쪽지에 적어 창 아래 붙였다. 공부를 하고 있으면 많은 것을 잊을 수 있었다. 식사 시간을 제외하면 이복동생과도 아버지와도 마주치는 시간이 없었다. 사람들과도 만나지 않으니 마찰이 없었다. 방학 동안 홀로 모든 시간을 올곧이 소비할 수 있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입학시험을 잘 보면 어디로든 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어디로든 떠나는 것을 상상하다 그만두었다. 상상하는 것은 나와 어울리지 않았다. 그간 내게 남은 것은 회상과 그 회상을 필사적으로 지우는 일 뿐이었다. 새아버지가 사업 파트너 가족과 함께 사이판으로 여행계획을 세웠을 때 나는 집에 남아서 공부를 해야한다고 싶다고 거절했다. 사일의 일정이었다. 정주한도 비슷한 이유로 여행을 가지 않겠다고한 모양이었다. 불길하게 잘 맞는 두 개의 조각이었다. 그의 부모는 그에게 공부를 하러 몇 번 나를 방문하라고 시켰다. 방학도 꽤 지나고 여름은 거의 막바지였다. 손님방에선 에어컨을 켜면 시원했다. 마음만 먹으면 손끝에 소름이 돋게 만들 수도 있었다. 나는 몇 번의 노력으로 작동법을 익혔지만 여름 내내 더운 방에서 공부한터라 서늘한 것이 오히려 어색했다. 나는 에어컨을 끄고 계속 창문을 여는 쪽을 택했다. 떠나기 전 어머니는 커다란 나무 상을 가져다 주었다. 함께 마주 앉아서 공부할 받침대였다. 그는 내가 오전에 정해둔 분량을 다 마칠 때까지도 오지 않았다. 첫 날은 오후 세 시가 되어서야 찾아왔다. 그가 들어왔다. 나는 얼굴도 들지 않고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영단어를 듣고 있었다. 사전을 찾으려고 테이블 아래를 더듬었다. 그가 자리에 앉았다. 손에 책 한 권 들고 있지 않았다. 대각선으로 앉아 침묵을 지켰다. 어차피 진도가 다르기 때문에 묻거나 하는 것은 원초적으로 불가능했다. 두 번째 왔을 때 그는 책을 들고 왔다. 수학 정석의 기초였다. 입시가 코앞인데 별로 진도도 나가지 않은 듯 책에 손때가 없었다. 나는 그가 더 이상 오지 않으리라고 생각하고 손님방을 비웠다. 그러나 예상은 빗나갔다. 삼일째 되던 날 아침부터 그가 찾아 왔다. 이복동생의 말을 듣고 일 층으로 내려갔을 때, 그는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채널을 돌리다가 내려온 나를 보고 얼굴을 들었다. “올라와.” 들어가자마자 창을 열었다. 나는 되도록 그늘 쪽을 그는 햇빛이 비치는 환한 쪽을 선호했다. 자리에 앉아 정주한은 처음으로 펜대를 물어가면서 뭔가를 풀었지만 삼십 분이 지나도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았다. 한 문제를 가지고 계속 다른 공식을 적용해보는 모양이었다. 바람이 불어 얇은 사전이 파라락 넘어갔다. 나는 그 소리가 듣기 좋아서 그대로 놔두었다. 사전이 완전히 덮어졌을 즈음 입을 열었다. “가르쳐줄까? 여기까지 왔는데...” 귀가 먹먹해질 것 같은 침묵 뒤의 목소리가 낯설었다. 근 한 달간 일상적인 대화를 제외하곤 거의 입을 열지 않았다. “됐어. 혼자 할 수 있어.” 듣는 것도 말하는 것도 건조했다. 밑바닥까지 간 것은 아니어도 서로 보지 말아야할 부분을 봤다. 나는 그의 페니스를 핥았고 그는 내 앞에서 다른 여자와 엉켜 뒹굴었다. 몇 가지 강렬한 이미지들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지금 눈 앞에 앉은 수험생이 호텔에서 내게 옷을 주던 정주한이 맞을까. 싫은 문제를 풀기 싫어서 인상을 쓰고 있는 그와 내게 달려들어 입술을 물어뜯던 그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어차피 오전 시간은 버렸다. 그가 가고나야 공부가 제대로 될 것 같았다. 나는 연습장에 낙서를 하며 그가 가기를 기다렸다. “너도 공부하다 딴 짓 할 때 있군.” “........” “뭐야 그건?” 나는 내가 연필로 흘려그린 낙서를 내려다보았다. “소? 말?” “동물 아냐.” “그럼 네 동생들이냐?” 갑자기 그는 무척 재밌다는 얼굴이 되었다. 책을 덮어버리곤 뒤로 손을 뻗어 기지개를 켰다. 공부 시작한지 두 시간만에 이미 그는 지루함의 절정을 달리고 있었다. “슈렉들 오늘은 조용하군. 항상 그렇잖아. 어디서든 너는 입 닫고 있고 슈렉이 번갈아 가면서 떠들어대지. 한 명도 괴로울텐데 두 명은 참 난감해.” 슈렉이라니, 이복동생들을 지칭하는 말인가? 슈렉, 그 초록색의 뿔 달린? 어찌 보면 좀 닮은 구석이 있는 것 같기도했다. 햇빛을 한 몸에 받아들이고 있는 그의 몸이 빛에 의해 희게 부서졌다. 홀로 조명을 받은 것처럼 그의 검은 티셔츠가 빛을 한가득 빨아들였다. 마지막 여름의 기운을 그에게서 찾을 수 있었다. 언제까지고 밝은 그리고 폭력적인 젊음의 상태로 유지될 것 같은 그의 얼굴. “정말 안 닮았어. 주워온거 아냐.” 그의 생각은 빗나갔다. 새아버지가 어머니를 사랑했고 받아들였다. 나는 부속품처럼 붙어있었다. 노크 소리가 들렸다. 가정부가 점심을 먹으러 나오라고 했다. 식탁이 아닌 마당에서였다. 날씨가 좋았다. 흰 테이블 위에 샌드위치가 가득 쌓여 이쑤시개에 꽂혀 있었다. 여동생들은 연두색 옷을 입고 있었다. 맞춘 것처럼 산뜻한 빛깔의 다른 패턴의 옷이었다.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그가 웃었다. 분명 그의 머릿속은 초록빛으로 물들고 있을 것이다. 정원에 앉아 한가롭게 샌드위치를 뜯어먹는 슈렉들과 별로 식욕이 없어 먹던 것을 내려놓는 나를 정주한은 번갈아 보았다. 그는 항상 누구에게든 시선을 공정히 주려 노력했다. 어느 정도 선천적이기도 하겠지만 가정 교육의 결과로 여겨졌다. 바람이 선선했다. 차양도 적당해서 햇빛이 가려졌다. 멀리 산이 보였다. 지금도 누군가 저 산을 필사적으로 기어오르고 있겠지. 암벽 아래서 그를 기다리는 일행들도 있을 것이다. 그가 떨어진다면 일행들은 어떻게 할까. 그의 시체를 데리고 내려갈 수 없어 암벽 아래로 굴려버리지는 않을까- 쓸모없는 생각들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여유롭고 선선한 점심식사 내내 여동생들은 정주한에게 상냥하게 그리고 나에겐 무례함으로 일관했다. 그는 실증도 내지 않고 적당히 쿨한 이웃집 오빠같은 태도를 내내 유지했다. 내 귀에 그들의 대화가 모두 무의미하게 흩어졌다. 단어들의 나열, 무의미, 나는 오후 공부 계획을 변경했다. “먼저 일어날게.” 그들이 앉아있는 흰 테이블에서 서서히 멀어졌다. 간헐적으로 이어지던 정주한의 웃음소리가 멎었다. 구름이 자리를 이동하면서 그늘이 자리를 옮겨갔다. 바람이 머리카락을 헝클었다. 그늘만을 딛어 나는 방으로 올라갔다. 손님방에서 공부한 책들을 모아 한 팔에 안고 그의 책을 정리해서 한 쪽에 쌓아두었다.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그가 들어왔다. “어디 가는 거야?” “할일이 있어...” “뭔데?” “넌 과외 다시 구하는게 좋겠어. 혼자 하면서 성적 오를 수 없을 거야. ” “어차피 유학 가버리면 그만이야.” “그래?” 나는 상 위에 올려 있는 그의 책을 들어 건넸다. 정주한은 받지 않고 나를 보았다. “너는?” “......” “넌 과외 필요 없어?” “너랑은 싫어. 특히 너희 집에서는.” 과외. 그 방. 이상한 공기. 그 안에서 나는 무릎을 꿇었다. 그에게서 났던 강한 냄새가 코에 이는 것 같았다. 그가 가까이 오자 쌕쌕거리는 숨소리가 들렸다. 정원에서 뛰어온 것일까. “다시 앉아. 여기 있어.” “그만 돌아가.” 그를 두고 방을 나왔다. 정주한은 따라 나오지 않았다. 아마 얼마 안가 돌아갈 것이다. 유배지로 걸음을 옮겼다. 이복동생들이 켜놓은 AV 소리가 아래층을 울리고 있었다. 그들도 입에 붙은 것처럼 반복했다. 유학가버리면 돼. 공부 같은 거 아무 의미없어. 아빠 우리도 보내줘. 새아버지는 그들의 터무니없는 어리광에 웃을 뿐이었다. 세계 어디로든 그들을 보내줄 것이다. 나는 대학에 갈 수 있을까. 아마도 대학에 들어간다해도 돈을 벌어서 가야할 것이다. 여동생들이 하는 말을 정주한도 반복했다. 나에게 뒤틀린 관심을 보인다는 것을 제외하면 정주한은 여동생들과 더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그들이 친해야 옳았다. 방에 들어가 책장을 밀었다. 겹으로 되어 있는 책 뒤편에 좀 더 내밀한 서적이 있었다. 나는 무의미의 시를 찾았다. 입에서 흘러나오는대로, 손끝이 가리키는대로 글을 휘갈기고 그것이 단어의 홍수를 이룬다. 그러나 의도하고자 하는 바는 없다. 읽는 사람도 쓴 사람도 자기 세계에서만 허우적댔다. 궁극에 이르러 얻는 것이 자기세계라는 점이 좋았다. 필사적으로 책을 찾아 서너 권을 쥐었다. 침대에 앉아 펴들고 나서야 조금 마음이 가라앉았다. 오래된 책 냄새가 코를 찔렀다. 노크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무시했다. 그대로 문이 열렸다. 가버렸을 줄 알았던 그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가 책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수백권의 책을 손가락으로 쭉 훑더니 창가 벽에 붙은 수백개의 쪽지를 한 번에 쭉 뜯어냈다. "그러지마!” 순서가 없으면 아무 의미도 없었다. 기억을 도와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그가 툭툭 건드린 물건들만 안타까워했을뿐 그를 방치했다. 그의 화를 돋군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 외의 행동은 생각나지 않았다. “사람이 말하면 반응도 안하면서 책이 그렇게 좋아?” “나가.” “여기 있는 책 다 태워버릴 수도 있어.” S가 남긴 책들이 타인의 손으로 모두 태워진다면 나는 어떤 기분이 들까. 발치 아래서 타들어가는 책을 보면서 울지 않을 수 있을까. 강한 거부감이 일었다. 파블로의 개. S가 주는 것에 심취해 차차 저항감은 무뎌졌다. 그가 아무것도 주지 않게 될까봐 몸을 사릴 수 없었다. 그렇게 얻어낸 책들이다. 그 책의 목록 중 하나는 지금도 내 손에 쥐어져 있는 것이다. "알았어. 내려가자. 내려가서 다시 공부해." 여기가 진짜 내 방이었다. 벽에는 교복도 걸려 있었다. 그를 이 방 밖으로 밀어내는 것이 중요했다. 가까이 다가가자 그가 손을 뻗어 팔꿈치 있는 곳을 움켜쥐었다. 그는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떨릴만큼 강한 힘이었다. 팔을 감아쥔 손에 점점 더 힘이 들어왔다. 그가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갈망에 가득찬 얼굴, 나는 할 말이 없어졌다. 정주한은 애초 공부할 생각도 없었다. 삼 일째 되는 날 아침부터 찾아와 점심 먹을때까지 온전한 평온을 유지했지만 이제 인내의 한계에 다다른 눈빛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도 용납이 잘 안되는 듯 머리를 몇 번 저었지만 이내 결심이 굳은 것처럼 행동했다. “여기서....하고 싶어.” 첫 날 그는 책 없이 걸어 들어와 세 시간 동안 내 얼굴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눈을 돌릴 수 없었던 것은 눈이 마주칠 것이 두려워서였다. 거부의 의미로 나는 공부에 집중하는 척 했다. 언젠가 한계가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치받혀 오는 욕정에 있어 섹스 외에는 별다른 제어장치가 없으니까.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유유히 그를 방치했다. 도망치지 않았다. 문을 잠궈둬야 했을까. 문을 잠궜다면 그가 찾아오지 않았을까. 어느새 또 다시 덫에 발을 물렸다. 파동하는 그의 눈빛을 마주하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쳐갔다. 어머니의 음성, 복도 근처에서도 선명하게 들렸던 신음 그리고 호텔방에서 본 정주한의 선명한 굴곡이 한데 뒤엉켰다. 마치 두 사람이 성교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있는 듯 나는 얼굴이 붉어졌다. “절대로 싫어.” 때때로 좀 떨어진 곳에 있는 테니스장으로 가기 위해 사내들이 젊은 여자들과 짝을 이뤄 한적한 골목을 가로질러 가곤 했다. 한가롭고 적당했다. 그들은 테니스 공을 바닥에 튕기면서 갈 때도 있었다. 나는 그들이 갑자기 내 방 창문을 향해 그 공을 던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느꼈다. 라켓에 정확히 맞아 이 쪽으로 날아오는 공은 유리창을 산산해 부술 것이다. 한꺼번에 날카로운 유리들이 창 안으로 쏟아지는 잔상이 여름 내내 일었다. 팔을 옥죄는 손이 아팠다. 뿌리치려 하자 그가 나를 침대 쪽으로 밀어갔다. 더 거부하면 강간 당하게 될 것이다. “머리가 터질 것 같아.” 그가 귀에 바짝 입을 대고 중얼거렸다. 나는 얼굴에서 점점 핏기가 빠져나가 벙어리가 된 듯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서서히 그가 팔을 풀었다. 구석에 몰아놓고도 조심스런 몸짓이었다. 구김 하나 없이 펴놓은 시트, 깨끗한 흰 시트 위에 앉혀졌다. 손가락 끝까지 몸에 힘이 쭉 빠졌다. 그가 문을 잠그고 다시 왔다. 나는 방금 전까지 망막 위에 아른댔던 무의미의 시가 싹 걷혀지는 것을 느꼈다. 더 이상 무의미 타령은 할 수 없었다. 그것은 내게 어떤 편안함도 주지 못했다. 그는 옆에 앉아 내 셔츠를 벗겼다. 오랫동안 탐한 장난감을 손에 넣은 것처럼 기대감에 들뜬 손길이었다. 그의 머릿속을 채우는 생각은 혹 너를 어떻게 망가트려줄까, 어떻게 부숴줄까...? 그런것일까? 아프게 하지마. 제발. 되뇌이며 나는 정주한의 눈 앞에 엎드렸다. 그는 내 어깨에 입술을 갖다댔다. 그의 움직임과 나의 수치가 뒤섞였다. 콘돔을 뜯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만이 살아 내 귀에 죽음을 강요하는 것과 같았다. 청각과 몸 속 깊은 곳에서 움직이는 쾌감이 서서히 일었다. 그의 아래 깔려 나는 관계가 끝날 때쯤 희열을 느꼈다. 순간적인 섬짓함으로 계속되었다. 나는 나를 증오했다. 그의 얼굴은 나른함과 의혹이 뒤섞여있었다. 조금 어두웠으면 보이지 않았을텐데, 흙빛을 띄는 얼굴이 잘 보였다. 정주한의 머리카락은 헝클어져 있었다. 그가 옷을 입었다. 살이 닿았던 피부가 쓰렸다. 나는 옷을 입기도 전에 먼저 티슈를 뽑아 그의 흔적을 닦아냈다. 그리고 아까부터 간절하던대로 창문을 열었다. 지나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거리 그대로의 변하는 것도 달라지는 것도 없었다. 멀리 보이는 이웃집 창문에 불이 켜져 있었다. 불투명한 덮개에 가려 빛은 미약했다. 유리창을 덜컹이는 바람 때문일까. 가슴이 서늘했다. 정주한은 말없이 곧바로 방을 나가버렸다. 개학하고 부터는 쭉 자율학습이었다. 이미 유학쪽으로 마음을 정한 놈들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비상사태였다. 서로에게 신경이 곤두선채로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내 성적은 정체기였다. 담임은 별다른 방법을 제시하지 못했다. 어차피 그에겐 기대도 없었다. 공부하는만큼 나오고 있지 않은 건 확실했지만 목표한 대학도 없기 때문에 진로에 대한 불안은 없었다. 선생은 두꺼운 진학 서적에서 상위권에 있는 몇 군데를 집어주었다. 뒷페이지에 있는 곳이라도 어디로든 집에서 나갈 수 있다면 만족이었다. 그러나 집에서 나간다는 것이 즐거움을 가져다 주지는 못할 것이다. 스무살이 지나 오랫동안 한 곳에 앉아 호수나 강을 응시하고 있을 모습이 내 그려졌다. 찾아오는 사람 없이 가끔 나를 품고 싶어하는 이들의 시선을 피해 나는 점점 더 깊은 곳으로 숨어들어야 할 것이다. 중간 고사 물리시험을 보다가 코피를 흘렸다. 회색 시험지 위로 굵은 피가 방울 방울 떨어졌다. 내가 양호실로 가는 틈을 이용해 아래 학년 학생들은 커닝을 하느라 부산했다. 제대로 기회라고 생각하는 그들을 뒤로 하고 나는 양호실로 갔다. 어차피 거의 끝까지 체크했다. 체크한 곳까지 점수가 매겨질 것이다. 양호선생은 지혈을 제대로 해오지 않았다면서 나를 질책했다. 그녀는 머리가 깨져서 가도 지혈탓을 하는 인간으로 악명이 높았다. 간호장교 출신으로 학생들 사이에선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으로 불리고 있었다. 지금도 전장에는 시체가 한가득 쌓여있어 너희는 행복에 겨운 거다, 그런 논리가 부유층 자녀들에게 통할리가 없었다. “피가 잘 안멎을테니 코 중앙 부분을 누르고, 그래 그렇게. 시험은 다 보고 나왔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양호선생은 내 쪽을 가릴 수 있게 커튼을 쳐주었다. 그녀가 건네준 거즈로 코를 막고 나는 침대 한 쪽에 누웠다. 시트는 한 번도 빨지 않은 것처럼 검게 절어 있었다. 계속 이어진 시험 때문에 피로해 금세 눈꺼풀이 무거웠다. 양호선생이 한 번 커튼을 걷었지만 잠이 든 것을 보곤 깨우지 않고 그냥 나갔다. 얼마나 잠이 들었을까. 작은 소리에 반사적으로 눈을 떴다. 눈 앞에 누군가 서있었다. 얼굴이 두 세겹으로 보이다가 하나로 겹쳐졌다. 삭발을 한 반장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일어나 앉자 가방을 툭 던졌다. 시험지가 마구 구겨져서 들어있는 가방은 열린채였다. “종례 끝났어. 담임이 갖다 주라고 해서...” “응. 고마워.” “시험 잘 본 거야?” 무의식적으로 코를 더듬었다. 거즈를 떼내자 피는 멎어있었다. “채점을 안해봐서 모르겠는데...” 나는 말끝을 흐렸다. “사실은 내가 맞춰봤어. 몇 개 안 틀렸더라.” 그의 가시 돋힌 말에 나는 피식 웃었다. 성적이 비슷한가? 여름 이후로 내 성적은 별로 좋지 못했다. 다시 한 번 고맙다고 하자 그는 냉기를 뿜으며 나가버렸다. 형광등 불빛에 삭발 머리 꼭지가 반들하게 빛났다. 그가 가고 나서 잠시 멍한 상태로 앉아있었다. 드르륵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양호선생이 들어오면 아직도 안갔냐고 퇴근시간 늦어진다고 뭐라 할 게 뻔했다. 그 여자는 그런 여자였다. 서둘러 커튼을 걷고 나가려는데 누군가 앞을 막아섰다. 여름방학, 그 일이 있은 후로 단 둘이 마주하는 것은 거의 한달만이었다. 양호실 침대는 벽에 붙어 있기 때문에 내려오지 못하게 막는 일쯤은 쉬웠다. 그는 내 옆에 걸터앉았다. 나는 옆으로 물러앉았다. 다시는 그가 내 곁으로 오는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비열한 무리들에 섞여 어슬렁거릴 일은 있어도... “어디 아파?” “별로...” 가라앉은 목소리가 내게 물었다. 손가락에 피가 굳어 있어 뻣뻣했다. 이상한 감각, 나는 손가락을 구부렸다 폈다 해보았다. 내 손이 아닌 듯 동작이 어색했다. 그는 내 눈을 보려고 했다. 검은 눈동자, 그 날 그의 눈동자는 사념을 넘어 진창 속을 헤매고 있었다. 그것은 내게 상실감을 지니게 했다. 아니 그 표현은 옳지 못했다. 애초 잃을 것이 없으므로 상실은 불가능했다. “그 날... 어땠어?” 정주한은 한참만에 순진한 기운이 서린 물음을 던졌다. "......." “난 좋았어. 아니... 아니었어.” 그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가고 나서 침대 시트를 모두 걷어내버렸다. 처음처럼 선혈은 없어도 냄새가 배었을 것이 분명했다. 어머니가 오기까지 시간이 있었지만 나는 모두 걷어냈다. 더럽혀진 옷을 몰래 빠는 것엔 이골이 나있었다. 시트를 걷어내 세탁실에 가서 처리한 후 마당에 널었다. 내 방으로 돌아오는 내내 이유없이 다리가 후들거렸다. 뼈를 드러낸 짐승의 형상으로 버티고 있는 침대 위에 누웠다. 등껍질이 모두 벗겨진 것처럼 몸에 오한이 일었다. 방금 무슨 일을 당한건가. 눈을 꽉 감았다. 온 몸의 감각이 열렸다가 그가 아무말 없이 간 것을 기점으로 송두리째 곤두박칠쳤다. “... 난 너한테 내가 처음일줄 알았어.” 명백히 화가 난 어조였다. 이런 추궁이 필요가 있을까. 짓밟는 희열도 처음이 아니라면 별로 의미가 없을 것 같아서? 그만해라, 그런 실없는 소리는. 손을 뻗어 뭔가 더 말하고 싶어하는 그의 입을 덮었다. 그가 내 손을 신경질적으로 쳐내고 입술을 일그러트렸다. “처음은 누구였어?” “... 넌 누구였는데?” “이영은. 너는?” 그와 내가 처음으로 친구처럼 대화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화 내용은 한심했다. 여자의 이름을 기대하고 질문한 것이 아니었다. 단지 말을 자르고 빠져나가기 위한 질문이었다. 나는 그의 답변과 그 다음 이어지는 재빠른 추궁에 점점 진지함을 잃었다. 반장이 보여주고 간 얄팍한 (도무지 숨길 줄 모르는) 질투심을 정주한도 지니고 있었다. “알고 싶어?” “.....” 네가 그토록 원한다면... “너무 많이해서 생각 안 나. 누가 처음이었는지. 됐지? 집에 갈 거야. 비켜.” 스스로도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몇 대 정도 얻어맞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가 몇 대 주먹을 휘두르고 양호실을 나가버리는 순서를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하면 정말 다시는 내게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이다. 코만은 피해서 때려줬으면 좋겠다. 또 다시 피가 철철 나는 것은 끔찍했다. 시트에 피라도 흘리면 양호선생의 울어대는 목소리를 지겹도록 들어야겠지. 어디쯤이 괜찮을까. 나는 양호실 침대 난간에 비스듬히 기댔다. 이 자세라면 주먹으로 배를 때려도 좋고, 원하면 바닥으로 끌어내릴 수도 있을 것이다. 눈을 내리깔고 그 동선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손을 뻗엇다. 거기까지는 예측 그대로였다. 그 손은 내 허벅지를 움켜쥐었다. 허벅지를 만지던 손이 배를 훑고 가슴까지 올라와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그의 손이 훑는 곳마다 간지러움과 자극이 일었다. 나는 가만히 그를 응시했다. “상관없어.” 정주한은 일종의 자기 최면을 걸고 있었다. “내가 일방적으로 그런거니까. 환상이었다면 스스로 부순 거니까. 상관없어. 몇 백명이랑 했든.” 몇 백명이라니... 과장이 심하다. 그의 목소리는 강약이 없이 점점 잦아들었다. 그의 손가락이 내 입술을 훑었다. 몸 어딘가에 아직도 사람을 향해 열려있는 틈이 있는 모양이었다. 지방도시를 떠난 후에도 틈이 완전히 아물어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입술을 더듬는 손이 그 틈을 필사적으로 벌리려 하고 있었다. 정주한의 손이 다시 목덜미를 내려와 호흡하는 배까지 내려왔다. 그 손은 말하고 있었다. 어디로든 가자. 어디로든. 단 둘만 있을 수 있는 곳으로..... 그 무렵부터 고향에서 편지가 날아들었다. 정확히 일주일에 한통씩이었다. 시편이 아가서가 그리고 다른 구절이 샅샅이 자필로 적혀있는 밑에 짧게 안부인사가 붙은 목사로부터 온 편지였다. 어머니가 먼저 개봉해 가져다 주었다. 그녀는 마을의 인자한 목사를 잊지 않고 있었다. 어머니가 S의 이름을 발음할까봐 두려워 나는 내가 먼저 편지를 받아 숨기기 시작했다. 펴지 않은 편지가 쌓여갔다. 욥기는 분명 흰 편지 안에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인간들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 목적으로 영혼을 흥정한다, 흥정하고 팔린다, 산 후에 그는 오롯이 악마의 손아귀에 귀속된다. 명백히 교훈을 바라고 쓰여지고 반복되는 이야기들이었다. 양호실까지 그가 찾아온 날로부터 수험일은 별로 멀지 않았다. 수백명과 잤어도 상관없어. 내 옷속으로 손이 들어왔다. 간지러움에 몸을 피하자 손이 따라왔다. 어떤 의사도 묻지 않고 더듬는 손, 그는 차라리 잘됐어. 차라리. 내 목에 자국을 남기면서 중얼거렸다. 무엇이 잘되었다는 것인지 묻지 않았다. 수험이 얼마 남지 않았다. 수업도 자율학습이었고 집에 가는 시간도 빨라졌다. 자리배치가 바뀌어 나는 애초 앉았던 맨 앞자리로 자리가 바뀌었다. 반장은 내 옆에 앉아 단 10초도 자리에서 떨어지지 않고 공부를 하고 있었다. 이 학교에 다니고 있다면 그도 별로 가난하지 않을텐데, 드물게 열을 올리는 학생이었다. 가끔 내가 뭘 풀고 있는지 염탐하곤 했지만 시험 막판이 되자 그럴 여유가 없는지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자습하다가 책상에 엎드려 있으면 그가 나를 툭 쳤다. 계속 공부하라는 의미였다. “경쟁을 해야 더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 그의 검은 뿔테가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의 서랍에 어머니가 아침에 먹으라고 준 초콜렛을 넣어주었다. “괜한 짓 하지마.” 집에 돌아갈때쯤 그는 다 녹은 초콜렛을 돌려주었다. 머리에 흰 띠를 메고 금방이라도 투쟁하러 갈 것 같은 반장의 흰자위는 녹색을 띄고 있었다. 몰두하는 사람은 항상 슬퍼보였다. 그가 시험을 잘 보길 바랬다. 정주한은 세 번 정도 집으로 찾아왔다. 내 방은 손님방보다 훨씬 구석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무슨 행동을 하던 좀 더 자유로웠다. 문을 닫으면 소리가 거실까지 전해지지 않았다. 그는 내 방을 다락쯤으로 여기고 있었다. 책상에 모의고사 문제를 쌓아놓고 풀고 있으면 불쑥 그가 들어와 문을 잠궜다. 그는 더 이상 나를 욕망하는 것을 숨기지 않았다. 그가 찾아올 때마다 좁은 원을 빙빙 돌고 있는 것 같은 현기증이 떠나지 않았다. 아프게 안 할게. 그는 항상 약속을 지켰다. 나는 유예 기간을 두기로 했다. 수험때까지만... 시험은 매우 지루했다. 확신 없이 각 영역을 모두 치르고 나왔을때 날이 저물어 있었다. 마중 나온 차량들이 어둠 속에서 헤드라이트를 켜고 저마다의 자녀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웃는 아이도 있었고 우는 사람도 있었다. 운동장이 넓어서 인파 속을 헤쳐 나오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나는 집까지 걸어가는 것을 택했다. 뭐라 설명하기 불가능한 기분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와 답을 맞춰보았다. 잘 본 것인지 아닌지 가늠이 잘 되지 않았다. 모의고사와 비슷해보였다. 수면제를 한꺼번에 세 알 삼키고 침대에 누웠다. 나는 한동안 시트에 얼굴을 부볐다. 그의 체취가 있었다. 뺨에 쓸리는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약기운으로 잠이 몰려왔다. 한달간의 형식적인 학기만이 남아있었다. 강당에 모여서 비디오를 보거나 영화를 단체로 보러 갔다. 졸업여행은 일정상의 문제로 모두 취소되었다. 원서를 쓰기 전 막바지 행사는 놀이공원 관람이었다. 내 옆자리는 처음처럼 텅 비었다. 반장은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시험을 망쳤을까. 나도 그리 잘본 시험은 아니었다. 내 결과를 보면 반장은 조금 즐거워질지 몰랐다. 물리시험을 몇 개 틀렸는지 세던 그였다. 재수의 뜻이 없는 학생들은 학교 뒤편에서 모두 책을 태웠다. 폐지를 쌓아두는 곳이었다. 나 역시 몇 권 없는 참고서를 태웠다. 불에 잘 타들어가는 참고서를 멍하니 보고 있었다.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정주한이 가까이 다가와 옆에 섰다. 그도 몇 권의 책을 불 속에 던져넣었다. 그가 태우는 책은 거의 새것이었다. 나는 바람에 날려 날아오른 재가 교복에 묻는 것을 방치했다. 가슴팍에 묻은 재를 그가 털어주었다. “건드리기만 해도...” 그가 뒷말을 흐렸다. “뭐?” “됐어.” 시험이 끝날 때까지 누구도 나를 귀찮게 하지 않았다. 파티 이후 한층 훼방을 놓지 않을까 싶었는데, 김중규는 복도에서 나를 보고도 보지 못한척 하면서 지나갔다. 김수영이 얘기했을지도 몰랐다. 건드려봐야 너희만 우스워진다고 말하지 않았을까. 만약 그가 말했다면 곧 정주한도 알게 될 것이다. 그의 신경은 무척 둔해 아직도 내 방에 대해 되묻지 않고 있었다. 사실 장소가 어디냐에 상관없이 오직 타오르는 욕구를 해소하면 마음이 편해지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는 관계를 끝나고 나면 항상 내 입술에 키스했다. 나는 어제 원서를 써두었다. 여기서 먼 지방대학으로 마음이 향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차 사줬어. 벌써 몇 달 전부터 결정해뒀지. 아직은 주차장에 있지만... 아무튼.” “차?” “수능 끝까지 보기만 해도 사준다고 했지. 면허만 따면 가고 싶은대로 갈 거야.” “원래도 네 마음대로 했잖아.” “더 내 맘대로 할 거야.” 책을 버리던 아이들의 수가 줄어들었다. 주위에 사람이 없는 지금이라면 이야기를 꺼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더 지나면 말하기는 점점 힘들어질 것이다. “시험때까지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어.” 그는 대답없이 휴대폰을 꺼내 어디론가 메시지를 보냈다. 계속 말을 이으려고 하자 그의 낯이 바뀌었다. 낯갈이 하는 어린애처럼 얼굴이 푸르죽죽해져 있었다. “무슨 말 하려는지 알아. 근데 듣기 싫어.” “그래도 들어.” “사귀는 것도 아닌데 정리가 필요해? 방금 말했잖아. 나 하고 싶은대로 할 거라고.” “......” 아무렇지 않은척 하고 있지만 내재되어 있던 불안을 건드린 것만은 사실이었다. 계속 건드려서 끝까지 밀어 붙여야 했다. 다시 아무도 오지 않는 방으로 돌려야만 했다. 그는 휴대폰을 접어 주머니에 넣고 바로 돌아서 버렸다. 나는 대화가 불가능함을 깨달았다. 불가로 더 가까이 갔다. 주머니를 뒤져보니 영수증 몇 장이 들어있었다. 뭘 산 기록인지 훑어보았다. 불 속에 던져 넣자 안에 쓰여진 글자들이 빠르게 불길에 빨려들어갔다. 그가 그간 내게 베푼 것은 안락이었을까. 정주한이 놀러오면 새아버지도 어머니도 슈렉도 전보다 한층 견디기 쉬웠다. 그들과 있어야하는 시간을 그가 나눠가주었다. 그가 등을 돌린채로 말했다. "교실로 가자. 거기 계속 있으면 얼굴까지 다 타겠다.” 불가의 뜨거움 때문에 붉어진 얼굴이 부끄러움 때문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이 부끄러움이라면 혹은 애정이라면... 학교의 정해진 행사에 따라 움직였다. 강사의 성교육이나 단체 영화관람 그리고 박물관, 마지막으로 모두들 환호해마지 않던 놀이공원 투어가 있었다. 단체로 움직일때 나는 거의 홀로 떠다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영화는 이미 본 것으로 유난히 클로즈업이 많아 눈이 아팠다. 나는 구석에 앉아서 대사를 읊는 배우의 입술만 멍하니 보고 있었다. 남자의 입술은 S의 입술을 떠올리게 했다. 그가 성경을 가르친다며 한 구절씩 읊고 그것을 따라하게 했다. 나는 바로 코앞에 앉아 그가 읊는 모든 구절을 따라했다. 제대로 된 뜻도 모른채 S의 음성이 머리와 몸을 휘젖고 다닐 뿐이었다. 영화 속에서 여자가 비명을 질렀다. 그의 방까지 이어지던 묻고 따라하기의 구절들이 생생히 떠올랐다. S는 점점 나를 하찮게 대했다. 외로움 때문이었다고 말했지만 두 번 다시 나를 택한 이유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더 이상의 이유는 없었다. 행위와 뒤따르는 나의 굴욕감만이 공기를 흐렸다. 영화 크레딧이 올라가고 있었다. 검은 화면에 점점이 박힌 글자가, 그가 가르친 성경구절들로 보였다. 많은 것을 가르쳤고 습득했다. 나는 S를 통해서 알지 않아도 좋을 수치와 회의를 깨달았다. 내 생명을 단축시키는 습득이었다. “이 자식들 시험 끝났다고 빠져가지고 그 따위로 할거면 학교 나오지마.” 담임은 11시가 넘어서 학교로 온 서너명의 학생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끝날 듯 하다가도 계속 이어졌다. 진학지도가 마음대로 되지 않자 한껏 화가 나있었다. 게다가 반장에게 잡무를 떠맡겨야 하는데 그는 오지 않고 있었다. 담임은 나를 교무실로 불렀다. 그리고 반장의 연락처와 집주소를 건네주었다. “형빈이가 아무리 연락을 해도 연락이 닿지 않는다. 그나마 너랑 제일 친했다고 하는데, 맞지?” 뭔가 오해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섣불리 아니라고 부정하기도 애매했다. 연락도 닿지 않고 찾아가도 세든 집 주인도 모른다고 할 뿐이서 속이 타고 있다고 했다. 분명 가출한 것 같지는 않은데 끝까지 속을 썩인다면서 내게 푸념을 늘어놓았다. 담임은 담배 연기를 피워올리며 싫으면 가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나는 그를 잘 몰랐다. 그가 나를 싫어한다는 것 외에는 아는 바가 없었다. 담임은 가장 친한 친구란에 그가 내 이름을 써놓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서류를 내밀어 보여주었다. 나는 담임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내 마음이 바뀔까 걱정되는 듯 한 번만 찾아가보고 없으면 다시는 부탁하지 않는다고 그는 신신당부했다. 그는 내 진학 계획 또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덧붙였으나 강한 어조는 아니었다. 담임은 늙고 주름지고 피로해보였다. 형식적인 수업이 끝나자마자 나는 가방 안에 반장이 정리하지 않은 책들을 다 넣어서 그의 집으로 향했다. 교문을 벗어나는데 정주한이 뒤따라왔다. 그는 추운지 거의 무장을 하고 있었다. 나는 손이 얼어서 근처 가게에서 장갑을 하나 샀다. 나오는데 그가 문밖에 서있었다. 여기는 학교에서 조금 떨어져 있어 지나다니는 사람은 없었다. “왜그래?” “.....” 그의 얼굴은 얼어있었다. “어디가는거야?” “반장한테..” “왜?” “담임이 가보라고 했어.” “웃기는 인간. 자기가 가지 그걸 학생을 시켜?” “갔는데 못 만났나봐. 자길 피하는거 같다구 그래서 나한테 가보라고 부탁한거야.” “왜 너야?” “.....” “친해?” “아니.” 그가 가장 친한 친구란에 내 이름을 썼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글자쓰기 연습이라도 하는 것처럼 또박또박 획까지 신경써서 칸을 채워 있는 내 이름. 나는 친한 친구란을 공란으로 비워두었다. 기록은 어차피 기록일뿐, 현실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내가 길을 잘 몰라서 그러는데 혹시 여기 어딘지 알아?” 불쑥 그에게 주소를 내밀었다. “길도 모르면서 어떻게 찾아.” 그는 핀잔 섞인 말을 던지며 주소를 빼앗아 들었지만 그도 주소로는 찾을 수 없었다. 서있는 그를 두고 나는 움직였다. 그는 계속 거리를 두고 내 뒤를 따라왔다. 사람들에게 여러번 물은 끝에 반장의 집주소를 찾을 수 있었다. 낮은 담에는 토끼나 새 나무 따위가 그려져 있었다. 벽화는 봄풍경이지만 빌라 주변을 장식하고 있는 나뭇가지는 매우 앙상했다. 몇 대의 주차된 차들과 작은 타일들이 빼곡히 붙여진 빌라가 반장이 사는 집이었다. 벽에 전선이 마구 얽혀있었다. 입구를 들어가기 전 정주한이 들어와 내 팔을 잡아끌었다. “정말 들어갈 거야?” “응.” “뭐라고 할 건데? 부둥켜 안고 한 번 뒹굴어주기라도 할 거냐?” “그래.” 그를 뿌리치고 혼자 계단을 올라갔다. 낡은 집에 혼자 세들어 살면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니, 그 역시 이 도시 출신이 아니었다. 나는 자꾸 판단이 흐려질까봐 마음을 다졌다. 숨을 고르고 벨을 눌렀다. 한참을 기다려도 대답이 없었다. 입구 바로 앞에 놓인 끝이 깨진 화분은 속을 드러내놓고 있었다. 바닥만 겨우 채우고 있는 흙은 안이 메말라 버석버석했다. 삼십분 정도 화분을 응시하며 앉아있었다. 정주한은 날 따라오는 내내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쯤은 돌아갔을 것이다. 서너 번 더 문을 두드렸다. 나는 문에 귀를 대보았다. 홀로 있는 사람에게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것도 갑작스럽게 방문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모두 두려운 일이었다. 정적 뿐이었다. 나는 쪽지라도 남기려고 종이를 꺼내들었다. 추워서 손이 덜덜 떨렸다. 발소리가 나서 고개를 들었을 때, 정주한이 있었다. “멍청한 자식들.” 그는 반장의 옆집 문을 부술 듯이 두드렸다. 의아해서 무슨 짓인가 하는 찰나에 그가 소리쳤다. “개새끼야! 빨리 나와! 추워 죽겠어!” 왜 그러냐고 말릴 사이도 없이 그가 문을 발로 차기 시작했다. 나는 그를 잡아 말렸다. “그 집 아냐. 옆이야.” 순간 영원히 열리지 않을 것 같던 반장의 현관문이 스르르 열렸다. 그가 얼굴을 드러냈다. 한 번도 햇빛을 보지 않은 듯 파리한 얼굴이었다. 반장은 웃통을 벗은 채 추위도 느끼지 못하는지 현관에 맨발로 서있었다. “옆집에 아무도 안 살아.” “......” “시끄럽게 하지말고 돌아가.” 문을 닫으려는 찰나 정주한은 그를 밀어넘어트리고 안으로 몸을 들였다. 나는 뒤따라 들어가 문을 닫았다. 술냄새가 방 안 가득했다. 잠에서 깨어날때마다 다시 잠 속으로 기어들어가기 위해 마신 것처럼 그가 학교에 나오지 않은 날보다 더 많은 술병들이 입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완전한 삭발이던 그의 머리카락이 잔디인형처럼 좀 자라 있었다. 그는 바닥에 있던 다리가 부러져 테입으로 붙여놓은 안경을 집어쓰고 나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은 슬픔으로 공허했다. “와달라고 시위하는 거지 이게 뭐야. 멀쩡한 사람들 피해주지 말고 내일부터 학교 나와.” “......” 정주한의 말에 반장이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흡사 미친사람처럼 웃고 있었다. 혼자 이 방에 들어왔다면 나는 정말 자제력을 잃고 그의 괴로움에 빨려 들어갔을지도 몰랐다. “심은혁 너 왜 왔어? 승자의 우월함이냐?” “나도 시험 잘 못봤어.” “담임이 시켰지. 그렇게 말하고 잘 구슬러서 데려오라고.” “... 지방대 갈 거야. 잘 못봤어. 정말이야.” 그의 방을 훑었다. 옛날 내 방만큼 씁쓸했다. 살림은 몇 개 없었고, 낡은 책과 혼자 오래 있는 사람의 냄새만 있을뿐이었다. 이 방에 있는 것은 올곧이 그의 체취겠지. 그는 철저히 혼자였다. 시험에 대한 질책도 홀로 감당하고 있을 터였다. 나는 가방에서 그의 이름이 매직으로 쓰여진 책을 내밀었다. 다른 애들은 다 태워버린 책이었다. 그의 교과서만 남아있었다. 왜였을까. 나는 한 권을 마저 꺼내지 않았다. 나를 가장 친한 친구란에 적어준 학생의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믿어줘. 나도 시험 잘 못 봤어.” 나를 보고 어이없다는 듯 정주한이 혀를 찼다. “아예 애걸을 하지 그래." "....." "어리광도 정도껏 부려. 반장 이 찌질한 새끼야.” 겨울은 해가 빨리 졌다. 하늘이 포도주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나는 그냥 걸었다. 추웠지만 걷고 싶었다. 잠시 넋을 놓고 걷고 있는데 뒤에서 그가 손을 잡아 끌었다. 그가 한숨을 쉬었다. “그만 가라. 다리 아파.” 나는 얼굴을 들어 주변을 보았다. 낯선 골목이었다. 집들이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반장의 빌라에서 반대 쪽으로 가야 번듯한 주택가가 나오는데 반대쪽으로 걸어온 모양이었다. “넌 왜 계속 따라왔어?” “...몰라.” 그는 부루퉁하게 하품을 했다. 몸이 바짝 얼어있었다. 이미 완연하게 어두워진 골목에 기대섰다. 바람에 뺨이 난자당하는 기분이었다. 오히려 낯선 동네에서 나는 마음이 가라앉았다. 도시에도 이런 곳이 있었다. 어머니는 새아버지와 함께 항상 내가 위화감을 가질만한 곳으로만 돌았다. 식사도 관람도 그랬다. 그럴 듯 하게 반짝이는 것들에서 나는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하늘을 어지럽게 가로지르고 있는 전선과 전선에 깃털을 가득 웅크리고 있는 새떼가 마음을 흔들었다. 추워 죽겠어. 집에 가자. 그가 나를 끌어안았다. 그의 체온은 처음 느꼈던 것에 비해 식어있었다. 겨울은 겨울이었다. 항상 타오르기만 하는 그의 체온이 식다니... 그가 말을 끝내면서 입술을 댔다. 메마른 입술이 쓰라렸다. 입술부터 시작해서 턱 끝까지 내려왔다가 다시 목덜미로 옮아갔다. 눈을 감으라는 듯 눈꺼풀에 입술을 댔다. 나는 눈을 감았다. 입을 벌리자 혀가 혀에 닿았다. 누군가 골목을 지나갔다. 그는 멈추지 않았다. 눈 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사람에 대한 내 경계심이 흐려지고 있다는 사실이 불길했다. 그 후로 정주한은 다른 사람 같았다. 처음 나를 괴롭히던 때의 기억은 완전 증발해버린 것처럼 잘 대해주었다. 싫증나서 안쓴다는 핑계로 휴대폰을 주었다. 새아버지가 압수한 휴대폰이 있다는 얘기를 했지만 막무가내였다. 반장을 찾아갔다 온 날을 기점으로 그는 적극적으로 변모했다. 김중규들 앞에서는 아니었지만 김수영에게는 어느정도 나와의 관계를 이야기한 듯 싶었다. 뭐라고 얘기했을까. 그들이 쓰던 음담패설을 떠올렸다. 둘 사이엔 비밀이 없다고 했다. 김수영은 셋이 있으면 알 듯 모를 듯한 얼굴이었다. 방관하고 있지만 하나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처럼 내가 새아버지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끔찍했어. 정말 몇 번이나 뛰쳐나오고 싶었는지 몰라.” 정주한이 머리를 젓자 김수영이 웃었다. 김수영이 피우는 담배는 항상 향이 좋았다. 박하향. “아버지가 차 사준다고 안했으면 끝까지 못참았을 거다. 맞지?” “점심까지 참은게 아깝잖아. 나중엔 식욕이 없어질 정도였어.” “나는 그럭저럭 볼만 하던데. 아는 문제도 많이 보이고, 정선생님한테 과외하면서 돈낭비만 한게 아니란걸 알게 됐지.” 그들 중 유학파가 아닌 것은 김수영 뿐이었다. 이미 나머지들은 공부를 포기했지만 미래를 포기한 건 아니라는 둥의 말을 흘리고 다녔다. 처음부터 그랬지만 시험이 끝난 후의 그들은 더욱 사회의 규범 그리고 한계와는 연관이 없어보였다. “넌 어땠어?” 의자에 앉아서 호수를 쳐다보고 있는 내게 김수영이 물었다. 잘 봤냐는 물음도 그렇다고 내 진짜 생각을 묻는 질문도 아니었다. 그저 네가 여기 정주한과 나와 함께 있다는 것을 환기시켜주는 질문이었다. 날씨가 쌀쌀한데도 야외수업을 할만한 곳이 없어서 바깥에 앉아 있는 것이 한 시간째였다. “잘 봤으면 밥이나 한 번 사. 제이드 어때?” “난 제이드 싫어. 거기 맛없어.” 난 제이드가 어디인지도 몰랐다. 네가 진짜 부잣집 소년이 아닌 걸 알면 괴롭힘이 잦아들거라고 했지만, 모르고도 그들은 이미 나에게 흥미를 상실했다. 다른 세계에도 먹잇감은 얼마든지 흔했다. 굳이 귀찮게 날 건드려 막판에 정주한과 수가 틀리느니 다른 길을 택하기로 한 것 같았다. 이 쪽도 재밌어 흥미로워. 빙긋이 웃는, 웃으면 반달이 되는 그의 눈꼬리가 매력적으로 휘어졌다. “학교 등록해보고 괜찮으면 다니고 영 아니면 나도 너 따라갈거다. 주한아.” “오지마라. 징그럽다.” “섭섭하게 왜 그래. 아무래도 그런 식으로 결말 날 것 같지 않아? 뻔하잖아. 대학 생활이란거. 형들 봐도 몇 년 못 다니고 다 떠났어.” 무슨 생각에선지 정주한은 나에게 몇 점이나 나왔냐고 물었다. 못 봤을까봐 사뭇 걱정하는 어조였다. “상관 없어. 망쳤어도 재수는 안할 거니까.” “대학은 정했어?” 정해진 사실은 없었다. 배치표도 보지 않았다. 다만 별로 잘보지 않았고, 도시 안에서의 장학금은 기대하기 힘들었다. 멀리 갈 거야. 멀리. 멀리. 그의 까만 눈동자를 응시하면서 나는 내 방에 잠글 잠금쇄를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 이젠 장소의 구애가 없어졌을 지도 몰랐다. 김중규가 그런것처럼 다른 곳으로 시야를 돌리고 욕구를 해소할 수 있는 곳은 얼마든지 널려있었다. 정주한 정도면 찾아내기 어렵지도 않을 것이다. 그 때 멀리서 고함 소리가 들렸다. 호숫가에 흩어져 있던 놈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심심하던 차에 이슈가 하나 생겼다는 것에 환호하며 학생들이 호숫가를 벗어나 별관 앞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나는 가장 뒤떨어져서 다가갔다. 어디서 터져나오는지 불분명한 고함 소리가 점점 커졌다. 별관 가까이까지 걸어갔을때 별관 꼭대기에 누군가 서있는 것이 보였다. 교복을 입은, 그의 머리에서 햇빛이 반사되어 빛이 났다. 잔디인형 같은 우스꽝스러운 머리카락 나는 그가 누군지 알아봤다. 그는 겉옷을 벗어 별관 아래로 던졌다. 옷이 금세 힘없이 바닥으로 낙하했다. 찾아갔던 날처럼 그가 옷을 벗어 상체를 드러냈다. “내려와!!!” 남자들은 휘파람을 불고 여자들은 비명을 울렸다. 눈을 감고 있었다면 나는 축제인줄 알았을 것이다. 눈을 감았다면 저기 별관 위에 서있는 사람이 반장인지 알아보지도 못했겠지. 그 날부터 조금도 길어지지 않은 머리카락, 머리를 꼿꼿이 들고 그는 우리쪽을 보고 있었다. 시험이 끝나고 그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차렷 경계를 할 사람도 없었고, 이동을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다. 담임은 무관심했다. 정작 방향을 잃어버린 그가 그 일을 계속 할 수 있을리 없었다. 안돼. 나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심장이 가슴뼈를 뻐개고 나올 것처럼 뛰었다. 그가 뿔테 안경을 벗자 퉁퉁 부은 눈두덩이와 녹색을 띄는 흰자위가, 그 흰자위가 보이는 것 같았다. 그는 분명 인파 속에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입을 열고 뭐라 말하고 있었다. 성대가 없는 사람이 되어 그 소리는 아주 작았다. 나는 점점 뒤로 물러섰다. 옥상으로 올라가 그를 붙잡고 싶은데 몸은 자꾸 숨으려 하고 있었다. “왜 그래?” 김수영이 숨으려는 내 팔을 잡았다. “뭐 찔리는데라도 있어? 반장이랑 친했나?” “.......” “바보같은 짓을 하는군. 재수하면 되잖아.” 그의 목소리는 이성적이었다. 이성, 한 학기 내내 이성을 습득하기 위해 애쓰던 반장이었다. 그는 옥상에 올라 지금 웃음꺼리로 여겨지고 있었다. 그가 안경을 다시 썼다. 그리고 아래로 뛰어내렸다. 둔탁한 소리를 내면서 무언가 으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일순간 비명이 일고, 조용해졌다. 바람이 불어 우리가 방금 본 것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목격 후부터 바로 치우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앞서 있는 학생들이 뛰어내린 자의 소재 파악을 원하며 떠들고 있었다. 그래 내 곁을 무수히 스쳐갔던 그였다. 그의 이름이 몇 번 불렸던 것 같지도 않아. “꼭 두부 같아.” 정주한은 신음 비슷한 소리를 내면서 얼굴을 돌렸다. 김수영은 담력이 약하다는 듯 정주한에게 장난을 걸었다. 하지 말라고 말하면서도 정주한은 별로 심각한 기색이 없었다. 으 두부 못먹을 거 같아. 제이드 두부 요리는 안 팔지. 거기로 가자. 그가 남긴 말은 그게 다였다. S가 내 귀에 읊은 구절이 욥기라는 것을 배웠다. 성경 시간을 두 시간이나 할애해 그는 욥기를 설명했다. 고난을 주고 고난을 당하고 버텨내는 욥의 일대기... ‘내가 돌아오지 못할 땅 곧 어둡고 죽음의 그늘진 땅으로 가기 전에 그리하옵소서 이 땅은 어두워서 흑암 같고 죽음의 그늘이 져서 아무 구별이 없고 광명도 흑암 같으니이다’ S는 그 인물에 심취해 있었다. 특히 고난이라는 부분에. 공부시간이 길어지면 나는 슬쩍 빠져나왔다. 깊은 신앙과 친절함으로 그를 멀리하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그런 그와 특별한 관계라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고 싶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자꾸 끔찍한 느낌이 들었다. 성경시간이 끝나면 나는 그의 방에 있어야했다. 정해진 규칙이었다. 헤드폰을 끼고 있으면 그가 빼앗았다. 바닥에 떨어진 헤드폰에서 약하게 음악이 흘러나왔다. 음울한 전조같이, 나는 그와 단 둘이 방에 있는 것이 싫은 것인지 잠시 후의 겪게 될 성교가 싫은 것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불안은 늪처럼 깊고 끈적거렸다. 포르노 테입 속에 등장하는 것들을 그는 모두 갖고 있었다. 그의 명령에 따라 축축한 바닥에 누워있으면 그가 옷을 벗겼다. 바닥에 깔린 먼지가 신음하는 호흡에 딸려 입 안으로 들어왔다. 큰 소리를 낼 수 없었다. 진동하는 바이브레이터가 항문을 통해 감각을 진동시켰다. 살인사건의 희생자들, 그 희생자들의 얼굴. 입에 죽음이 가득 쑤셔 넣어져 있고, 공포로 얼굴이 얼룩진, 나는 그들의 표정이 나와 흡사하리라고 생각했다. 온 몸을 저릿하게 나락으로 몰고가는 추행이 이어졌다. 한 번의 거부가 더 많은 고통을 체험하게 했다. 그는 불을 끄고 내 두 팔을 묶어둔채로 교회로 나가 일을 보고 돌아올 때도 있었다. 돌아와 팔을 풀어주면 내 얼굴은 눈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여름방학 내내 그 일들이 반복되었다. 강도는 끝을 모르고 치달았다. 가학은 한 번 딛은 지점에서 결코 아래로 내려가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애초 지방도시에 정착할 인물이 아니었다. 도시의 신학교에서 뭔가 문제가 생겨 어쩔 수 없이 이쪽으로 내려오게 된 것이다. 헐떡이는 나를 방치하고 몇 번 심각한 얼굴로 전화통화를 하는 그를 목격할 수 있었다. 넌 내게 온 시험이야. 난 그 해답을 찾아가고 있어. 그는 차차 나를 관찰하는 모습을 띄었다. 외로움도 사랑에 대한 언급도 없었다. 그저 나를 벗겨 쓰러트리고 울며 애원할때까지 몰고가는 것이 전부였다. 마지막 장마가 있더 날 그는 비에 젖은 채로 방 안을 서성거렸다. 나는 구석에 앉아있었다. 전날 나는 집에 가지 못했다. 어머니에게도 연락을 하지 않았지만 이미 어머니는 S를 완전히 신임하고 있었다. 그 모든 신임을 부술 용기도 내가 철저히 피해자가 되는 것도 용납하기 힘들었다. 나는 모진 대접을 견디면서 밤을 버티고 오후 늦게야 잠에서 깨어났다. 그에게 맞은 뺨은 붉어져 있었다. 옷은 어디로 갔을까. 빗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그가 남긴 성교의 흔적들을 피해 옷을 꿰어입었다. 걸레를 집어 입는 것처럼 더러움 뿐이었다. 이제 이 모든 더러움과 수치에 익숙해질때도 되었지만 결코 익숙해지지 않았다. 구석에 앉아 천장에 닿을 만큼 키가 큰 그를 올려다보며, 그의 옛 모습을 필사적으로 찾고 있었던가. '방에선 안되겠어.' 그는 성경책 앞에 올려져 있던 병을 들고 가까이 다가왔다. 몸을 움츠리는 내 어깨를 잡아 바깥으로 끌어냈다. 그는 나를 교회에서 떨어진 숲으로 끌어갔다. 나는 그를 따라가면서 슬리퍼 한 쪽을 잃어버렸다. 맨 발에 진창이 그대로 닿았다. 무릎 아래가 흙으로 얼룩졌다. 나무들이 하늘로 팔을 뻗고 있어 하늘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천둥 소리가 들렸다. 그는 나를 무릎꿇리고 병을 내 입 아래 대주었다. ‘마셔.’ ‘... 이게 뭐에요?’ ‘이 방법이 최선이야.’ 나는 병을 받아들었다. 갈색병은 뚜껑이 열린채 희고 뿌연 액체가 가득 담겨있었다.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는 오랜 고뇌에서 벗어나 안락한 얼굴이었다. 병을 떨어트리면 분명 깨질 것이다. 액체와 빗물이 섞이고 그 다음은... 나는 그의 아래서 숨을 끅끅 대는 내 모습을 떠올렸다. 나는 약병을 입에 댔다. 이상한 냄새가 났다. 약병을 쥔 손이 떨렸다. 눈 앞이 흰 빛으로 가득차면서 누구의 얼굴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의 얼굴이 이상한 희열로 빛나고 있었다. 그가 그토록 원하던 신을 범접한 얼굴이었다.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약병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무서워. 죽기 싫다는 생각보다 그에게서 이렇게 벗어나는 것, 그것이 싫었다. 다른 방법은 없었을까. 나는 다시 고교생으로 돌아가고 그는 다시 도시로 떠나가면 안될까. 그 제안을 하지 못하고 나는 흐느꼈다. 그는 약병의 모서리를 받히고 천천히 쳐들었다. 어제 그의 페니스를 빨던 나의 입술 안으로 농약이 흘러들었다. 내 모든 믿음이 파괴되는 순간이었다. 정주한이 새로 뽑은 차를 타고 제이드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기다리고 있던 여자들이 있었다. 제이드는 생각보다 멀었다. 외진 곳에 위치한 레스토랑이었다. 이런 곳을 으레 알고 있냐고 묻는 김수영이나 의례 인지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정주한에게 나는 거리감을 느꼈다. 처음 보는 여자들은 연상이었다. 메뉴는 수십가지가 넘었다. 고른다는 행위가 껄끄러웠다. 집에 혼자 틀어박혀 있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여기까지 따라왔지만 이 쪽도 힘겹기는 마찬가지였다. 형빈은 실려갔다. 다행히 즉사는 아니었다.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게 메뉴를 선택했다. 자꾸 신물이 밀려왔다. 화려하게 장식한 음식들이 차례로 나왔다. 메뉴의 구분 없이 포크를 들고 선택해 먹으면서 그들은 떠들었다. 김수영과 정주한이 반장을 대화 주제로 올리지만 않았다면 조금 나았을까. 상황묘사와 자살시도의 유무 경험과 목격담들이 줄을 이었다. 고기를 썰어 입에 넣으면서 조금의 주저나 조심스러움도 없이 모든 것은 공처럼 굴러다녔다. 농약을 마시던 그 날을 악몽으로 추억할 수밖에 없었다. 원하는 것에 대해 주저하지 않는 그들의 여유가 나를 숨막히게 했다. 정주한은 자살자에 대한 동정심이 전혀 없었다. 반장의 집에까지 갔으면서, 그의 방을 굴러다니는 무수한 술병들을 보았으면서도 그의 외모에 대해 반감밖에는 지니지 않았다. 정주한은 그를 팔십년대 다큐멘터리에 등장하는 화염병을 던지는 노동자에 비유했다. 여자들이 립스틱을 고쳐 칠하면서 옷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김수영은 나를 그윽하게 응시하며 돈 없는 자들의 비루한 핑계와 그들의 게으름에 대해 질시를 날렸다. 왜 이야기가 이렇게 까지 흘러들었는가. 흐름이란 두려웠다. “학교 주변에 있는 건물들 보면 솔직히 좀 한심스런 생각이 들 때가 많다니까. 시위하는 노동자들도 마찬가지야. 자기들이 그 위치에 밖에 서지 못한 걸 반성해야할 시간에 남의 탓으로만 돌리니까 말야. 그 자리가 싫다면 노력해서 바꾸면 돼. 안된다는 건 알아달라고 징징대는 건 철 지난 변명일 뿐이지. 그런 건 우리 아버지 같은 경우엔 일축하거든. 착취니 어쩌니 하지만 착취의 정확한 뜻을 모르는 것 같아. 노동보다 분에 넘치는 돈을 받으면서 착취라니 말도 안되지.” 디저트를 떠넣으려고 애쓰고 있는 내 입으로 다시 농약이 흘러들고 있었다. 음식은 쓰고 비렸다. 혼란은 미각까지 바꿔놓았다. 그 숲에서 그들이 나를 보았다면, S의 자리에 서서 왜 좀 더 나를 잔혹하게 다루지 않았느냐고 조언했을 것이다. 김수영은 그 곳에서 하루 자고 온다고 남았고 둘만 돌아가게 되었다. 면허를 딴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했지만 그는 운전을 잘했다. 어렸을 때부터 자기 소유의 차가 꼭 갖고 싶어 아버지 차로 몰래 연습을 하고 삼촌들의 도움으로 특별 강습도 받았다고 했다. 겪을수록 그는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타입의 인간이었다. 차에 관련되어 기분 좋게 얘기하는 그에게 도저히 보조를 맞춰줄 기분이 아니었다. 외진 곳에 있는 주유소에 정차했다. 가득 채워달라고 말하는 사이 아르바이트생이 커피를 가져다 주었다. 받지 않는 그를 대신해 내가 받아들었다. 챙이 긴 모자를 쓰고 있었지만 나는 그를 알아보았다. S가 오기 전 마을을 떠났던 선배 형이었다. 그는 나처럼 D시에서 태어났고 그 마을에서 자랐다. 함께 블로뉴숲의 여인들도 보았다. 그리고 그는 떠났다. 새카맣게 탄 특유의 피부가 아니었다면 그를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응시하자 그도 나를 알아보았다. 은혁아. 은혁아. 그는 내 이름을 두 번이나 불렀다. 반가워하면서도 자신을 좋지 않은 눈으로 보는 정주한을 의식했다. 어디서건 근무 중에는 사담은 금지였다. 그의 눈엔 견딜 수 없는 반가움이 일렁였다. 나와 그는 별로 친분이 없었지만 외지에서의 외로움이 한 눈에 와닿았다. 그도 이 동떨어진 주유소에서 혼자였다. 나는 잠깐 얘기를 하고 오겠다면서 차에서 내렸다. 구석에서 선배와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나보다 먼저 그 곳을 떠났지만 D시의 소식은 더 잘 알고 있었다. 목사에게서 그도 편지를 받는다고 했다. 안부를 묻고 전화통화까지 한다는 그는 나에게 운전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다. 나는 대답을 회피했다. 선배에게 전화번호를 적어주었다. 새아버지에게 압수당한 휴대폰 번호였다. 선배는 S를 몰랐다. 고향사람은 S를 아는 사람과 S를 모르는 사람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는 S를 모른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그 앞에서 웃을 수 있었다. 가능하다면 친밀하지 않은 그와 반장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다. 그는 이해해줄 것이다. 그 가난을, 비루한 생명력을 그리고 벽에 얽혀있는 금방이라도 감전사고를 일으킬 것 같은 전선들에 대해서. “누구야?” “아는 형이야.” 차를 몰아 어둠이 깔린 도로를 빠져나가면서 그는 백미러로 주유소에 서서 계속 손을 흔들고 있는 그를 흘낏 거렸다. 그는 선배가 건네준 주유소 휴지를 창문을 열고 휙 던져버렸다. “왜 버려.” “먼지가 나서 못써. 오히려 닦을 수록 더 먼지가 달라붙는다구.” “......” “저런 사람도 알아?” “... 그냥 선배야.” “고속도로도 아니고 국도잖아. 손님도 뜸한 길에서 주유소 알바하고 있을 정도면 알만한거 아냐. 어떻게 아는 사이야?” “......” 가방을 쥔 내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들은 고용인을 하찮게 여겼다. 서버가 조금의 실수라도 하면 용서가 없었다. 모든 무례를 당연하다 믿고 행사했다. “... 고향 선배야.” “고향?” “그래.” “쭉 여기 살았던 거 아니었어?” “태어난 도시는 달라. 엄마가 재혼하면서 올라오게 됐어. 재혼하면서 날 전학시켰어. 지금은 새아버지가...” 그가 갑자기 차를 세웠다. 바퀴가 미끄러지는 소리가 나면서 차가 비스듬하게 섰다. “식사할때마다 만나는 사람 친아버지가 아니야. 새아버지야.” 나는 줄줄 말을 이었다. 허, 기가 찬다는 듯이 그가 내 쪽으로 몸을 비틀었다. 그의 얼굴이 아니라 나는 앞유리를 응시했다. 도로에 지나다니는 차는 없었다. 흰 선으로 구획이 지어진 도로가 쭉 뻗어있었다. “새아버지만 아니었다면 너도 저 주유소에서 기름 넣고 있었겠네. 내 차가 지나가면 굽실거리고 인사하면서, 그래?” “그럴지도 몰라.”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그가 화를 내야 맞는 상황인가. 새아버지든 아니든 내 몸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그는 취할 것만 취하고 나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누누이 말했다. “그럼 저 빌어먹을 자식을 못 만났으면 난 계속 몰랐겠군.” “.....” “부잣집 아들 노릇하면서 우월감이라도 느꼈어? 그래서 말 안한거야?” “우월감은 왜 느끼겠어. 사실은 그렇지 않잖아.” 그가 내 옷을 잡아당겨 자기 쪽을 보게 했다. 시선을 거두자 더 옷을 세제 잡아당겼다. 나는 그의 손을 거두려 했다. 그가 손목을 휘감아 비틀었다. 순간적 비명을 삼켰다. “우리 부모님이 너만 보면 칭찬했잖아. 과외하러 오는 날 마다. 네 모든 것을 칭찬해서 날 열받게 했잖아. 넌 한 번도 부정하지 않았어. 틀려?” “......” “하루종일 다른 놈 때문에 죽을 상 하고 있어도 같이 있고 싶어서 데리고 다니는 내가 이상한 거 알아. 나는 편하기만 한 줄 알아! 넌 아무것도 얘기 안해주고 있어. 내가 너에 대해서 아는 게 없잖아.” “말하고 싶지 않아. 해도 넌 알아듣지 못할테니까.” “출신도 불분명하고, 모든 게 다 거짓투성이야.” “... 반장한테 가봐야겠어.” 말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나는 자제력을 잃었다. 반장의 그 부러진 안경테와 어설프게 붙여진 테입이 눈 앞에 아른거렸다. 그리고 흘러나오던 그의 뇌수... 그가 병원으로 실려갔을 시간에 나는 정주한의 차를 타고 유흥을 떠났다. 잘못된 선택이었다. “뭐? 어딜 간다구?” “반장...” 그가 핸들을 쾅 내리쳤다. “형빈이 많이 다쳤을 거야... 아까 두부 같다고 했지.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자살하는 사람 두고 그런 말 하지 않아.” “끔찍하잖아. 그런 소리도 하지 않으면 희석이 안돼.” “잔인하게 말하면 덜어져?” 넌 그 애 집에도 나랑 갔었잖아. 함께 갔었잖아. 추위속에서도 날 따라왔잖아. 작은 폭발, 내 목소리가 커졌다. 새 차에 오물을 흘리고 있는 느낌이었다. “미치겠군. 뭐 진짜 한심하다고 생각했어. 양호실에서 들어갈려고 한참이나 망설이던데. 나보다 앞에 와서 제발 좀 빨리 가줬으면 했는데 이십분 넘게 들어갈까를 망설이더군. 들어가선 무슨 얘기 했어?” “.......” 그의 손이 목을 조를 것 같았다. 반장은 물리시험 몇 개 틀렸냐고 물어봤다. 그에게 물리시험이 점수가 중요했다. 나는 눈물이 날 것 같아 인상을 썼다. “너 설마... 그 자식이랑도..” “역겨워. 부모들도 네 친구들도 마찬가지야. 인간도 아냐.” 그의 손이 기어이 목덜미를 쥐었다. “뭐가 역겨운지 말해봐.” 완전히 경직된 손가락이 귀 아래를 눌렀다. “... 사람이 죽었어. 너희 둘 다 눈 앞에서 보고도 밥 먹으러 가서 농담거리로 삼았어. 주유소에서 일하는 선배한테 함부로 말하지마. 나한테는 몇 없는 사람이야. 너는 그럴 자격 없어.” 목덜미를 쥐고 있던 손이 얼굴을 때렸다. 화끈거리는 아픔이었다. 나는 차문을 열고 튕기듯이 도로로 빠져나왔다. 바람이 심하게 불어 옷이 반대방향으로 젖혀졌다. 도로 한 복판으로 외진 곳이었다. 앞으로 빠르게 뛰어가는데 그가 뒤따라 와서 팔을 낚아챘다. “방금 한 말 취소해.” “싫어.” “취소해!” “취소한다고 없어지는 거 아냐. 내 진심이 알고 싶다고 했잖아. 그게 내 진심이야.” 그가 나를 도로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흙밭으로 끌어갔다. 다리가 질질 끌렸다. 길게 자란 잡초들이 무릎까지 자라 있고 군데 군데 둥치가 잘린 나무들이 있는 곳이었다. 그가 나를 바닥에 팽개쳤다. 그가 머리카락을 움켜쥐어 똑바로 자기 얼굴을 향하게 했다. 반항하자 그의 주먹이 광대뼈에 빗맞았다. 그는 바닥에 넘어진 그대로의 내 가슴팍에 올라타 앉았다. 무게에 숨이 막혀 금세 헐떡였다. 서관 창고에서처럼 그가 위에서 나를 노려보고 나는 바닥에 묶여있었다. 그의 눈빛이 온 몸에 와서 박히는 느낌이었다. 어둠을 등지고 있는 그의 머리카락을 바람이 마구 헝클었다. 그의 양 손이 머리에서 얼굴을 훑고 목을 쥐었다가 가슴팍으로 내려왔다. 그가 내 바지를 끌어내리고 몸을 낮췄다. 허벅지에 닿은 그의 페니스는 이미 발기해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불거진 핏줄이 보였다. 아무말도 하지마. 처음부터 이렇게 대했어야했어. 그가 입을 손바닥으로 틀어막았다. 이런 식의 전개가 가장 고통스러웠다. 그가 인상을 쓰면서 나를 안아올렸다. 식칼로 마구 쑤시는 듯한 아픔 뿐이었다. 그는 옷을 추스르고 옷에 묻은 흙을 털었다. 흙이 날려 내 눈으로 들어왔다. 여름에 이루지 못했던 일은 그는 겨울이 되어서 이룬 셈이었다. “알아서 해. 네 집으로 가든 여기서 죽든. 나도 귀찮아.” 그는 가버렸다. 웃자란 잡초 위에 홀로 누워있었다. 머리카락이 자꾸 눈을 찔렀다. 벌레들이 얼굴을 기어다녔다. 저 멀리 잘린 나무 둥치가 점점 사람 몸뚱이처럼 보였다. 무서워... 사람이 오는 것도 오지 않는 것도 무서웠다. 드러난 하반신이 추위에 점점 감각을 잃어갔다. 그의 차가 시동을 걸고 곁을 지나쳐 사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그의 차가 떠났다. 몇 대의 차가 속도를 내며 지나갔다. 누가 찾아와 나를 본다면 경찰에 신고할지도 몰랐다. 어머니가 아는 것은 원치 않았다. 그녀의 평화를 방해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나는 비척비척 무릎을 가슴쪽으로 끌어당겨 움직였다. 손으로 땅을 딛는데 감각이 없었다. 팔에 긴 뱀이 지나간 것 같은 흉한 자국이 남아 있었다. 나는 속옷을 벗어 그의 정액을 닦아내고 버렸다. 바람 소리가 국도를 휘젓고 있었다. 반장이 올라갔던 별관 옥상에서도 이런 바람이 불었을 것이다. 미안해. 정말. 그냥 이유없이 내가 잘못했어... 입에서 토사물이 흘러나왔다. 낮부터 목에 고여있던 폐수였다. 몇 번 토하고 텅 빈 국도에 그대로 서있었다. 그가 돌아올 것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토막난 의식을 간신히 이어보려고 애쓰고 있었다. 차가 후진해 한참만에 다시 돌아왔다. 정주한은 차에서 내리지 않고 정면을 보고 있었다. 그의 차로 걸어가 가방을 꺼내는데 그가 차에 타라고 했다. 처음부터 이렇게 대했어야 했어. 그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처연했다. 나는 순순히 차에 올랐다. 끔찍한 국도를 벗어나 도시 안으로 들어왔을때가 되어서야 정주한은 말을 꺼냈다. “십분이었어. 십분만에 다시 돌아간 거야.” “... 응.” 나는 최대한 타이밍을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 턱 아래로 흘러내린 토사물이 굳어가고 있었다. 주유소 휴지를 버리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가 편의점에서 차를 세우고 생수와 휴지를 가져다 주었다. 나는 손에 들고만 있을 뿐 사용하지 않았다. “써.” 그가 생수통을 열어주려다 내 손을 건드렸다. 그가 먼저 움찔했다. 나는 태연하려고 부단히 애썼다. “토했구나.” “응.” “니가 이상한 소리 하니까 그렇지.” “......” “다시는 그런말 하지마. 화나고 억울해.” “.....” 앞차의 헤드라이트가 깜빡였다. 개조를 했는지 연푸른 빛이다. 눈에 있는 물기 때문에 빛이 반사되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깊은 물색. “난 착취 우월감 그런거 잘 몰라. 네가 말하는 거 한번도 생각 안해봤어.” “......” 그의 목소리는 울림이 좋다. 죄책감에 젖어 있을때는 훨씬 좋다는 것을 지금 느꼈다. “그러니까 너도 잊어.” “네 말이 다 맞아. 내가 잘못했어.” 나는 순순히 대꾸하며 그의 얼굴을 보았다. 당하기 전의 그 얼굴이었으면 했다. 그래야 그가 나를 안심하고 놓을테니까. 정주한의 뺨은 불기가 없는데도 붉어져 있었다. 그가 키스하려는 듯 얼굴을 가까이했다. 눈동자가 불안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냄새 나서 싫어. 나 토했잖아. 다음에 봐.” 그가 몸을 뗐다.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 손등의 푸른 정맥이 도드라져 있었다. 나는 차에서 내렸다. 아까 선배가 했던 것처럼 그의 백미러에 보이게 적당히 자연스럽게 손을 흔들었다. 주저하면서 그의 차가 집 앞 골목을 빠져나갔다. 미안하다고 말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가 준 휴대폰을 바닥에 놓고 발로 밟았다. 액정이 조금 나갔을뿐 부서지지 않았다. 그가 미안하다고 하지 않은 것이 나로써는 다행이었다. 사과했다면 이것이 사랑이라고 믿게 되었을테니까. 다시 그를 만나지 않을 것이다. 며칠 동안 계속 눈이 내렸다. 침대에 누워 책을 읽다가 눈을 밟고 싶어 마당으로 나갔다. 마당에 흰 눈이 쌓여있었다. 발자국을 만들면서 돌아다니다 몸을 숙이고 눈을 뭉치고 있는데 가정부가 전화기를 들고 왔다. 그녀의 머리와 어깨에도 눈이 내려 앉아 있었다. 대학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입학 담당자는 꼭 자신의 대학에 등록 해달라는 축하 멘트를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이 통화를 끝으로 나는 원서를 접수한 세 개의 대학에 모두 붙었다. 도시에 있는 대학은 떨어지길 바랬으나 결과는 합격이었다. 장학금은 없었다. 손에 쥐어진 전화기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대학에 등록하면 졸업하는데 사년이 걸릴 것이다. 졸업 후에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거실로 들어가 소파에 앉아있는 어머니 옆에 앉았다. 나는 도시에 있는 대학은 떨어져 대기상태고 지방에 있는 대학 두 곳만 붙었다고 전했다. 이런 류의 거짓말을 하는 것에 어느새 익숙했다. 어머니는 별 말이 없었다. 어머니와 나는 자연스레 멀어졌다. 친밀함은 하향곡선을 그렸다. 자연스러웠기 때문에 끝을 모르고 멀어졌다. 이복 동생들은 눈이 와서 밖에 나가지 못한다면서 가정부에게 맛있는 것을 해달라며 멋대로 메뉴를 바꾸고 있었다. 내가 어머니나 새아버지에게 혼나거나 가족들 사이에서 철저히 소외되는 것이 그녀들의 즐거움이었다. 어머니는 쿠션 밑에서 편지를 하나 내밀었다. 편지는 이미 뜯어져 있었다. 목사에게서 온 편지였다. “S씨는 아직도 교회에서 일하고 있을까? 너랑 친하게 지냈었지.” 갑자기 거론된 그의 이름에 나는 얼굴이 굳어졌다. 그 뒤의 대화는 잘 생각나지 않았다. 나는 방으로 올라갔다. 손에 움켜쥔 편지가 구겨져 있었다. 쓰레기통에 버리려다 서랍을 열고 안에 넣었다. 언제든 어머니가 보여달라고 말하면 아무 거리낌없이 보여줄 수 있어야 마찰을 줄일 수 있었다. 여태껏 받은 편지들과 마찬가지로 깊숙이 은폐하려는데 문이 열렸다. 어머니가 따라 들어와 내가 채 닫지 못한 서랍을 열어젖히고 뜯기지 않은 편지들을 한꺼번에 발견해냈다. “이게 다 뭐니?” “...나중에.. 나중에 보려고 넣어뒀어요.” "말도 안돼." 어머니는 편지를 뜯어 한 번 훑고 내게 내밀었다. 십 여통의 편지를 그렇게 반복했다. 눈 앞에서 읽으라는 의미였다. 이미 개봉된 편지에는 성경구절이 있기도 했고 단순한 안부인사가 적혀있기도 했다. 그녀가 지켜보는 아래 나는 감춰두기만 했던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머리 속에 들어오는 구절이 하나도 없었지만 한가지는 확실했다. 욥기의 구절은 한 줄도 없었다. “예전엔 너 교회 가는 거 좋아했잖아. 캠프가 아니어도 며칠씩 자고 올때도 있었잖니.” 별로 예민할 문제가 아닌데도 어머니는 신경을 긁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나와 공유할 수 있는 추억과 대화의 주제가 교회와 S로 한정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어머니의 기억속에서 나와 가장 친밀한 사람은 S일까. 내가 자살하거나 한다면 S를 부를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소름이 돋았다. 되도록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애썼다. “별로 뭐...” “뭐라고 써있어?” “그냥.. 내용은 별거 없어요. 안부인사 뿐이에요.” 어머니는 책장과 책상을 한 번 휙 둘러보았다. 내가 뭔가 더 숨겨놓은게 없을지 찾는 눈치였다. 숨겨놓은 건 아무것도 없어요. 난 숨길 만큼 애착을 갖는 물건이 없으니까. 어머니는 책장을 밀어젖혔다. 왜 네가 애착이 없냐는 듯 낡은 책 몇 권을 정확히 짚어냈다. "S씨가 준 책들이지?” “......” “이사올 때도 가지고 온 줄은 몰랐는데. 빌리고 돌려주지 않았다면서. 다시 만나면 돌려주도록 해.” 커튼 뒤의 창문이 바람에 덜컹거렸다. S가 창에 붙어 내 방에 침입하려는 것처럼 격한 바람이었다. 그에게 가는 것이 싫어 딱 한번 숨어든 적이 있었다. 그래봐야 내 움직임은 금세 간파당했다. 그가 쪽창을 두드리고 대문을 두드렸다. 그 폭력적인 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그는 일부로 내가 무서워하는 어둠 속으로 나를 데리고 다녔다. 처음엔 억지로 그 길 위에 올려졌고 나중엔 알몸으로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어머니의 말은 다시 그와 내가 만나리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 같았다. 책상에 올려져 있던 휴대폰이 울렸다. 끊어지지 않고 계속 울렸다.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액정이 깨져 검은 잉크가 번진 뒤로 발신자명이 찍혀 있었다. 글씨는 오류로 뭉개졌지만 정주한에게 계속 걸려오고 있음이 분명했다. 다음에 만나자는 말로 그를 보냈다. 그 뒤로 일주일이나 만나지 않았다. 팔과 얼굴에 난 상처들은 차차 흐려졌지만 끔찍함 그 이상의 무엇이 자꾸 눈 앞을 떠다녔다.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첫 번째 대학 합격 소식을 전하자 새아버지는 압수한 휴대폰을 돌려주었다. 학교가 위치해 있는 지명을 말하자 더욱 화색이 돌았다. 그는 내가 멀리 떠나는 것을 분명 바라고 있었다. 나이 들었으나 탄탄한 그의 육체 앞에서 나는 자꾸 뒷걸음질 치면서 그가 원하는데로만 말하고 있었다. 그 깨진 휴대폰은 뭐냐고 묻는 어머니의 질문에 친구가 놓고 갔다고 둘러댔다. 자꾸 거짓말하는 것이 의심스럽다는 눈을 하고 어머니는 방에서 나갔다.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이렇게 온전하게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내 생명 자체가 거짓이었다. 나는 휴대폰의 배터리를 제거했다. 반장의 취향을 몰랐다. 그래서 다만 곁에 두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될만한 책으로 선별했다. 머리맡에 두거나 배고 자기만 해도 머릿속으로 스며든다는 말도 안되는 책 이야기를 나는 믿었다. 그가 입원해있는 병원은 학교 근처였다. 그 날 실려간 이후로 다른 병원으로 옮기지 못하고 중환자실에 붙박혀 있었다. 상태가 심각하다고 했다. 나는 병원 접수 데스크를 지나쳐 면회 신청을 하고 허락이 떨어지면 중환자실로 들어가 그의 침상 옆에 몇 시간씩 앉아있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내 방학을 오랜만의 휴식을 그의 그림자가 잠식하고 있었다. 처음 병원에 찾아갔을 때는 병실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했다. 그저 병실 밖에서 분주하게 왔다갔다하는 간호사의 신발만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나를 발견하고 형빈의 아버지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딱딱한 대기 의자에 앉아 우리는 한동안 침묵했다. 가장 친한 친구라는 수식은 항상 나를 따라다녔다. 그가 부여해준 유일한 것이었고 그의 아버지에게 나의 방문은 작은 위안이었다. 잠시 휴직을 신청하고 간호를 위해 올라온 형빈의 아버지. 방문 때마다 한번도 바뀌지 않는 그의 옷이 나를 더욱 중환자실을 떠나지 못하게 했다. 어제 전화로 합격을 통보받은 학교는 그의 책상에 이니셜로 새겨져 있던 학교 중 하나였다. 누구에게도 그 대학에 합격했다고 마음편히 말할 수 없었다. 내 자신에게조차도 그랬다. S를 알기 전에 나 역시 명문대 진학을 원하는 그저 평범한 학생이었을 뿐이었다. 합격한 학교는 중학교 내내 꿈꾸던 학교 목록에 있었다. 사 년이나 되는 대학생활의 나른함을 익히 알고 있지만 한 편에선 입학하고 싶은 생각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누구에게 말할 수 있을까. 나도 그 학교에 가고 싶다고... 떠나길 바라는 새아버지나 이미 이복여동생들의 어머니가 된 어머니...? 김수영이나 정주한에게...? 죽어가고 있는 반장에게는 결코 말할 수 없었다. 어떤 것도 마음 편히 욕망할 수 없는 혼수 상태였다. 반장의 나체를 간호사가 식물 대하듯 했다. 이불을 걷고 소변줄이 잘 끼워졌는가를 기계적으로 확인하고 링겔을 갈았다. 의식이 미미한 상태에서 마구 갈아 끼워지는 바늘 탓에 그의 손등과 팔은 온통 멍투성이었다. 몸에 덮인 푸른 줄무늬 이불은 아무렇게나 젖혀져 있곤 했다. 그는 두 개의 팔과 손을 갖고 있었지만 바로잡을 수 없었다. 그의 아버지가 보호자 휴게실에서 잠을 청하는 동안 그의 곁을 지켰다. 의무도 아니고 애도도 아니었다. 천장의 균열과 흰 벽을 바라보는 동안 시간은 느리게 흘러갔다. 햇빛이 때로 침대를 비출 때면 꽉 감은 그의 눈두덩이의 실핏줄이 확연히 보이곤 했다. 푸르고 붉은 핏줄이었다. 피가 돌고 있었다. 머리카락은 다시 바짝 깎여 부서진 자국을 내보이고 있었다. 천장의 균열처럼 그의 머리통에도 긴 금이 그어졌다. 그와 같은 병실에 누워있는 모두 그랬다. 면회시간을 끝내고 밖으로 나왔을 때, 담임이 와있었다. 그는 모금한 성금을 흰 봉투에 넣어 들고 왔다. 어디서 걷었는지 봉투는 두툼했다. 반장의 아버지는 연신 고개를 숙였다. 담임의 뒤에는 김수영이 서있었다. 모금에 제일 도움을 많이 준 학생이라는 설명을 듣고 나는 대충 상황을 이해했다. 김수영은 지갑에서 지폐 몇 장을 집어 던져주었을 것이다. 그것을 감사히 받아들이는 반장의 아버지. 김수영은 커다란 통유리 너머로 반장의 병석을 훑는 듯 싶었다. 무미건조하게 일렬로 누워있는 환자들을 훑곤 금세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네 사람은 병원 내부에 있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형빈의 아버지는 우리에게 대학 축하한다는 말을 남기고 가장 먼저 자리를 떴다. 나는 그에게 내가 합격한 지방대 이름을 말하는 것이 좋았다. 그의 아들은 평생 가보려 하지도 않을 만큼 형편없는 대학이었으므로 위안을 갖길 바랬다. 김수영이 알듯모를 듯 미소를 띄었다. 명백히 비웃고 있었다. 그가 가고 나자 담임은 비로소 내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그는 병원에 오기 두 어시간 전에 어머니에게도 축하 전화를 했다고 말했다. "아직 말씀 안드렸니? 서넛은 나와야 학교 이름에 현상유지가 되는 거다.“ 그는 내가 기뻐하지 않는 것이 의아한 듯 고개를 저었다. 이미 여러번 곱씹은 인생에 대한 충고를 마치고 담임은 함께 와준 김수영에게 인사를 하고 떠났다. 담임이 가고 나자 그와 나만 단 둘이 남았다. 커피는 차갑게 식어 설탕맛 뿐이었다. “... 학교에 벽보로 붙었는데 숨길 수 있다고 생각해?” “내가 말한 학교에 붙은 것도 사실이야.” “반장 자퇴 서류 떼려면 분명히 학교에 가게 될텐데 다 보라고 붙여놓은 벽보에서 네 이름을 확인하겠지. 물론 내 이름도 함께. 너처럼 행동한다고 타인에 대한 배려가 아니야. 형빈이도 깨어나서 다시 시험보면 된다고 적당히 얼버무리는 편이 낫지.” “붙었다고 해도 내가 가지 않으면 거짓말이 아닌 거야.” “그 무슨 괴논리야.” 그는 쿡쿡 웃었다.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처음 만난 이래 김수영의 인상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모든 악재는 그를 피해서만 일어났다. 그는 고도의 위치를 선점하고 있었다. 차갑고 초월적이었다. “돈이라도 좀 가져왔어? 모금액 얼마 안되더라.” “.......” “난 고작 십만원 밖에 안냈는데, 전교 최고액이라니. 십 원 낸 자식도 있는거 알아? ” “그래. 모금 생각은 못했어.” “넌 물론 한 푼도 안냈지.” “......” “여기 매일 올 만큼 동정심이 충만하다면 네 대학 등록금으로 도와주는 것도 하나의 방편이겠어.” 병원 업무가 곧 끝난다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집으로 돌아가야할 시간이었다. 면회시간은 진작에 끝이났다. 좀 더 일찍 벗어났다면 김수영과 마주쳐서 이런 언질을 듣는 일도 피할 수 있었을텐데... “넌 확실히 앞뒤가 안 맞아.” 그가 몸을 내 쪽으로 바짝 숙이고 목에 팔을 둘렀다. 그의 팔에 감긴 시계가 차르륵 소리를 냈다. “반항하는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순순하거든. 시각적으로 본다면 외형은 꽤 그럴듯한데 아마 속은 안 그럴거야.” “.....” “어렸을 때부터말야. 가령 예술작품이랄까 좋은 것만 몰두해서 보다보면 개중에 겉은 보기 좋지만 속은 썩어 들어간 작품을 알아보는 눈이 생기거든. 누구나 습득하게 되는지는 모르겠는데 내 경우엔 그래. 부모님이 워낙 미술품을 좋아하셨지. 그래서 널 보면 벗겨 놓으면 과연 어떨까 하는 느낌이 드는 건가?” 커피가 식지 않았다면 그의 얼굴에 쏟았을 것이다. 두려움은 없었다. 이미 김수영도 나도 학교라는 좁은 우리를 벗어났다. 아니 그는 진작 벗어나 있었던가. 나는 다른 방향의 문을 열고 나가려하고 있었다. 그것을 제지하듯 그가 말로 조금씩 힘을 가했다. “주한이 화 많이 났어. 그 자식은 자기가 잘못하면 더 펄펄 뛰지. 제이드에서 집에 가면서 무슨 일 있었지?” “우린 아무 일도 없었어.” “펄펄 뛰는 걸로 봐서 정주한이 너한테 뭔가 잘못했다는 말이 되긴 하는데, 내가 보기엔 여기서 태평하게 간호질이나 하고 있는 네가 더 나빠.” 그의 손을 뿌리치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의자가 확 뒤로 제껴지면서 요란한 소리를 냈다. 카페 안의 사람들 시선이 몰렸다. 몸에 점점 핏기가 빠져나가는 느낌. 김수영은 심장에 이를 박아넣는 것 또한 빠르고 정확했다. 파헤치기도 전에 이미 알고 있었다. 그라면 내 성감대 또한 가장 수치스러운 곳으로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평범하지 않음을 가장 먼저 발견한 것도 그였다. 그가 발굴해서 마스터베이션을 시키는 행위로 정주한의 눈앞에 제공한 셈이었다. "왜 화를 내고 그러시나..." 그가 나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성장을 멈춘 사이 그는 조금 더 자라있었다. “기다리라고 해. 찾아가서 미안하다고 할테니까.” “... 정말?” “그래.” “사실 그 자식 화난 단계는 이미 넘었어. 풀 죽어서 밖에 안 나와. 수영도 안가고 휴가도 다 취소했어.” 커피 잔을 쟁반 위에 모았다. 몇 방울 흘린 커피를 휴지로 닦아냈다. 들고 가 선반에 놓고 나가면 끝이다. 가방을 한 쪽 어깨에 메고 쟁반을 치웠다. 가방이 밑으로 쏠리자 그가 거들어 주었다. 가방 안에서 전화가 울렸다. “받아. 내가 할테니까.” 김수영이 나를 끌고 당장 그의 집으로 가자고 하는 것이 최악의 상황이었다. 나는 흐름을 깨기 위해 전화를 받았다. 주유소에서 일하는 선배에게 걸려온 전화였다. 그는 나에게 D시로 오라고 청하고 있었다. "목사님이 돌아가셨어. 목사님이..." 그는 울먹이고 있었다. 교회 철제 의자 가장 뒤편에 앉아 항상 불만스런 표정을 짓고 있던 선배였다. 몇 년의 타지 생활이 그가 마을을 그리워하게 만들었다. 때로 나를 자애롭게 바라보던 목사가 죽었다는 얘기를 들으면서도 나는 슬픔보다 앞서 필사적으로 확인 해야할 일이 있었다. 선배에게 더듬더듬 S의 인상착의를 설명했다. 그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아야만 목사의 장례식에 갈 수 있으리라. 선배는 금방 알아듣지 못하다가 한참만에 알아듣고는 목사의 곁을 지키던 사람들은 모두 떠나고 신도도 거의 없이 혼자라고 했다. 그의 최후를 지켜주고 있는 것은 자식들과 바싹 마른 아내 뿐이라고 전했다. 선배의 목소리는 점점 잦아들었다. S가 없다는 확신을 몇 번이나 받아내고 나서야 나는 내려가겠다고 수용했다. 김수영은 옷에 붙은 먼지를 털고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질문을 던지는 나를 이상하다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그는 잘못 그려진 미술품을 향해 의문을 제기하는 얼굴로 고개를 살짝 비틀고 나를 보고 있었다. 목사의 죽음 앞에서 나는 두려움을 해소하는데 급급했다. 김수영의 안목은 정확했다. 심미안이었다. * 심야버스를 타고 내려가는 동안 운전기사는 버스 내부의 불을 껐다. 버스가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도시를 등지고 나무가 우거진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나는 창문에 눈을 고정하고 점점 속도를 빠르게 하여 사라지는 불빛의 끄트머리를 바라보았다. 열 수 없는 통유리 밖으로 전선줄에 얽힌 도시의 풍경이 다하고, 곧 황무지와 같은 농가가 나타났다. 비슷한 풍경 아래 드문드문 집들이 보였다. 몇 없는 승객들은 잠에 빠져들어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악몽조차 꾸지 않을 것처럼 모두 진지한 얼굴이었다. 나는 내내 이상한 긴장에 휩싸여 있었다. 역은 조용했다. 나보다 먼저 도착해 몸을 웅크리고 잠을 청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내가 도착 시간을 잘못 계산했음을 깨달았다. 대합실 나무 의자에 앉아 머리를 감싸쥐었다. 버스를 타고 여기까지 실려왔다. S가 없음을 몇 번이나 확인 하고 표를 끊었다. 어머니에게 허락을 받자마자 떠나왔지만 막상 컴컴한 마을 입구를 보자 선뜻 발을 들일 마음이 나지 않았다. 삭막한 마을을 S는 떠났겠지. 나를 농약으로 잠재우고 홀가분하게 떠날 작정이었으니까, 내가 사라졌다면 그도 분명 여기 없을 것이다. 대합실을 나와 천천히 마을로 걸음을 옮겼다. 떠날 때 모든 것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S가 마시라고 준 농약을 나는 거의 다 흘렸다. 손이 떨려서 제대로 병을 붙잡을 수 없었다. 목구멍 안으로 삼키기도 전에 그 냄새만으로도 구토가 치밀었다. 나는 토했다. 바닥에 머리를 박고 흐느끼는 내 반응을 물끄러미 보던 그는 나를 두고 숲을 떠났다. 그가 완전히 멀어지고 나서도 나는 얼굴을 들지 못했다. 비에 젖어 축축해진 등, 더 이상 젖는다는 느낌도 없었다. 비는 점점 더 퍼부었다. 무른 흙이 패일 정도로 강한 빗줄기에 속수무책으로 두드려 맞으면서 오래도록 웅크리고 있었다. 한참만에 기어서 그 숲을 벗어났다. 토해놓고 온 죽음이 뒷덜미를 붙잡고 자꾸만 걸음을 휘청거리게 했다. 한 가지씩 사건이 생길 때마다 눈 앞에 펼쳐지는 마을의 풍경은 다르게 다가왔다. 높은 건물 하나 없는 낮고 작은 집들과 우기를 맞아 도랑으로는 물이 콸콸 흘러갔다. 길에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조용하고 고요한 마을이 지옥처럼 느껴졌다. S가 당장 뒤따라나와 나를 다시 집으로 끌고 가든 여기서 돌로 때려죽이던 간에 내 시체를 발견할 사람조차 없을 것이다. 집에 어머니는 없었다. 나는 어머니의 근무가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조차 잘 모르고 있었다. 내 머리를 채우고 있는 것은 S의 주먹이 어떻게 맞을 때 제일 아픈가 혹은 그가 한 번에 사정을 몇 번 하는가 따위였다. 채 열 페이지도 풀지 못한 혼란스런 낙서로만 채워진 문제집이 방에 아무렇게나 펼쳐져 있었다. 물을 뚝뚝 흘리면서 나는 문제집를 치웠다. 우두커니 서있는데 벽거울에 내 모습이 비췄다. 유리에 손자국이 아무렇게나 남아있었다. 음식을 먹은 흔적도 없고 냉장고도 썰렁했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이 된 것처럼 옷걸이에 걸려있던 서너벌의 어머니 옷마저 없어졌다.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으면서 나는 옷을 차례로 벗었다. 흙탕물로 더러워진 옷을 욕실에 갖다놓는데 어머니가 돌아왔다. 그녀가 한 달 전에 직장을 그만두었다는 사실을 나는 몰랐다. ‘우리는 여길 떠날 거야.’ 드디어라는 말이 뭉텅 잘려진 어머니의 말. 숲에서 기어나올때 나무에 온통 할퀴어진 내 뺨을 매만지면서 어머니는 꿈꾸는 표정을 했다. 아무 동의 없이 나를 세상밖에 태어나게 한 것처럼 떠나게 되었다는 통보 또한 갑작스러웠다. 몸은 기억하고 있었다. 가끔 대합실에서 차를 타고 시내로 가거나 도시로 관광을 떠났다가 교회를 거쳐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또렷히 기억해냈다. 멀리 십자가가 보였다. 붉은 색으로 밝혀져 있는 십자가를 지표삼아 다가갔다. 유일하게 불이 켜져 있는 곳은 목사의 사택이었다. 그 옆의 교회, 그리고 영화를 보곤 했던 마당엔 의자가 하나도 없었다. 이 장소에 다다르면 교회보다 S의 방에 더 많이 갔다. 보지 않으려 해도 내 눈은 S의 방과 창고 그리고 독특한 모양으로 문양이 새겨져 있는 창살로 향했다. 창고는 잠겨있었다. 나는 누군가를 깨우듯 가만히 자물쇠를 흔들어보았다. 딱딱하고 차가운 질감. 천천히 뒷걸음질로 멀어져 사택 안으로 들어갔다. 벽돌로 지어진 사택 안은 훈훈했다. 부엌과 거실 그리고 세 개의 방문이 한 눈에 보였다. 탁자에 목사의 아이가 엎드려 잠들어 있었다. 한갈래로 올려묶은 머리가 한쪽으로 쏠려 커다란 붓처럼 보였다. 나는 인기척을 내는 것이 조심스러워 한 켠에 서있었다. 켜둔 형광등의 귀퉁이가 오래 되어 컴컴했다. 목사의 아이처럼 설핏 잠들고 싶었다. 애쓰지 않고 그냥 자연스럽게... 목사의 시신은 어디로 갔을까. 그의 부인은. 약하게 가스 냄새가 났다. 나는 난방 온도를 내렸다. S의 방과 기계가 똑같아 조작이 쉬웠다. 이런 습득을 잊지 않고 있음을 깨달을 때마다 시간이 빠르게 흐르지 않는 것을 체감했다. 개척교회의 한계였을까. 목사의 신도는 많지 않았다. 장례식에는 익숙한 얼굴들만 보였다. 도시로 떠났던 이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앞줄에 서있었다. 나를 이리로 부른 선배는 검게 그을은 얼굴을 일그러트리면서 울었다. 기도와 찬송이 있었다. 정해진 절차를 밟아 목사를 보내는 이들. 지금 내 마음을 짓누르는 것은 슬픔일까. 나는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어렸을때 감정은 물 위를 떠다녔다. 흔적 없이 그저 착실히 다른 이들이 걸어간 길로 흘러가고 있었다. 목사가 관 속에서 일어나 내 얼굴을 몇 번이고 후려쳐 준다면 눈물이 날 것이다. S와 관계 된 후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언제나 울고 있었다. 나를 울릴 수 있는 것은 이제 슬픔보다 신체에 가해지는 폭력이었다. 다함께 의식을 환기하는 기도문을 반복해 읊었다. 죽음은 항상 삶과 함께 있으리니, 슬퍼하기 보다 감사하라. 혼절하지 않을까 싶던 목사의 부인은 담담하게 이겨냈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는 그 가족의 다정한 놀음을 알고 있었다. 가족 넷이 빚어내는 화음은 언제나 이 마을에 사는 사람들에겐 낯선 것이었다. 의식이 다 끝나지 않았지만 나는 밖으로 나와 입구에 섰다. 햇빛이 교회 쪽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나는 옆으로 약간 비켜 서있었다. 이 쪽을 향해 흙길 위를 걸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아이를 품에 안고 한 여자와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빛을 등진 그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다가 차차 보였다. 품에 안긴 아이의 엷은 머리카락에 분홍 리본이 매달려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떴다. 그는 분명 S 였다. 골격과 턱선. 비명을 지르고 싶은, 그러나 뭐라 소리를 질러야할지 몰랐다. 더 이상 내가 설명한다고 해도 그를 발견할 수 없을 정도로 외형이 변해 있었다. 몸에는 보기 좋게 살집이 붙었고 얼굴빛이 달라졌다. 내 육체를 분쇄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던 그가 아니었다. 그는 짧게 목례를 건네고 나를 스쳐지나갔다. 어떤 위해도 가하지 않았다. “이제 조용히 해야지.” 장난스럽게 이야기를 쏟아내는 여자아이의 입을 그가 손바닥으로 살짝 덮었다. 장례식을 끝내고 마을을 떠났던 사람들은 모두 선배의 집으로 향했다. 선배의 집은 교회보다 좀 더 외진 곳에 있었다. 걸어가는 동안 끊긴 길목마다 눈이 쌓여있었다. 방금 전까지 눈물을 훔치던 이들은 어느 정도 개운한 느낌으로 눈을 뭉쳐 서로에게 던졌다. 떠나 그들은 각자 직업을 가졌다. 여자들은 미용사와 간호 조무사가 되었고 남자들은 배달용역직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그들이 하는 악의 없는 농담을 들으면서 선배의 집 앞까지 걸어갔다. 나는 그에게 혹시 내가 살았던 옛집이 팔렸냐고 물었다. 그는 팔리지 않은채 떠날 때 그대로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목사부인에게 열쇠를 맡기고 떠났다. 팔리기도 전에 부동산에 내놓고 서둘러 그냥 떠나는 편을 택했다. 누구든 보여달라고 하면 좀 보여주세요. 열쇠만 맡겨놓고 그걸로 끝이었다. 팔리지 않는다고 했을때 어머니는 집의 권한을 목사 부인에게 완전히 넘겼다. 날은 아직 어두워지지 않았다. 이 인원이 다 여기서 신세를 질 수는 없을 것이다. 열쇠를 찾아 집으로 가는 편이 낫겠다고 선배의 집을 빠져 나왔다. 목사의 아내는 옛집이 마을회관으로 쓰여지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면서 열쇠를 갖고 나올테니 기다리라고 하고는 안으로 사라졌다. 목사의 아이들이 몇 마디 말을 걸어왔다. 내가 위로의 말을 걸기도 전에 그들은 이미 치유 단계를 밟고 있었다. 창고에 불이 켜있고 S의 방도 그랬다. S가 여기 와있다는 것을 증명하듯 환한 불이었다. 그는 창고의 철문을 열어놓고 분주하게 사택과 창고를 오가며 목사의 흔적이 남은 물품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의 몸에서 김을 뿜어져 나왔다. 재회를 생각해본적이 있었다. 그가 다시 나를 숲으로 끌고가 채 삼키지 않은 농약을 밀어넣고 마구 나를 짓밟거나 다른 이들 앞에서 나를 모욕하는 재회였다. 결론은 언제나 내가 필사적으로 도망가는 것이었다. “목사님 마지막 지켜드리러 왔구나.” “......” “어머니는 잘 계시지?” “네.” “네가 이번에 수능을 봤던가? 아 1년 남았나...?” “......” 나를 향해 그가 건넨 말은 무심하고 간결했다. 그는 부인과 아이가 있었다.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있다고 과시하지 않아도 자연히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이미 이 마을로 내려오기 전에 아이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S는 쉴새없이 창고를 정리했다. 철문을 열어둔 창고는 과거 막혀있을 때처럼 텁텁하고 숨막히는 공간이 아니었다. 그의 평온한 태도 앞에서 두려움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는 처음 만났을때처럼 온전했고 나 홀로 그를 변형시키고 그 허상에 떨어온 것 같았다. “... 집으로 가서 좀 쉬어야겠어요.” 열쇠를 받아들고 아무말도 하지 않으면 이상할 것 같아 목사의 아내를 향해 겨우 입을 열었다. “내일 떠날거니?” “모르겠어요.” “가기 전에 또 들러라. 꼭. 알았지?” 그녀는 내 손을 꼭 잡고 짧게 기도했다. 예전엔 이런 상황에서 항상 S의 시선을 느꼈다. 자신이 아닌 사람과 단 둘만 이야기를 하면 심하게 경계했다. 지금 그는 전혀 내 쪽을 보지 않았다. 자신의 피와 살을 섞어 만든 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몸을 흐르는 피는 S의 손길이 그랬듯 뜨거울 것이다. 열쇠로 문을 열자 삐걱거리면서 문이 열렸다. 아직 사람의 손길이 곳곳에 남아있었다. 마을 회관으로 쓰인다한들 사람들이 찾아올 리가 없었다. D시의 사람들은 대개 자기 영역을 벗어날 줄 몰랐다. 떠날 때 필요한 것 몇 가지만 정리하고 갔기 때문에 물건들은 그대로였다. 바닥에 버려진 것을 주워들었다. 철지난 잡지가 널려있었다. 바닥이 차가워 나는 난방을 틀었다. 진동 소리를 내면서 가동이 되었다. 수도도 끊기지 않고 잘 나왔다. 이름 뿐인 이 회관을 유지시키고 있었던 사람은 분명 목사였을 것이다. 이제 그가 죽었으니 이 공간도 폐기처분 될 것이다. 나는 손을 씻고 한 켠에 앉았다. 해가 꺼져들어가고 있었다. 노을이 방바닥에 스물스물 몸집을 불려 밀고 들어왔다. 어두워질때까지 머릿속이 멍한 채로 앉아있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소녀의 기도, 익숙한 멜로디. 찾아올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문을 열었다. 어제부터 쌓여온 피로로 모든 것이 느긋하게 풀어져 있었다. 현관으로 들어오는 사람을 바로 보았을때 조금 놀랐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내가 뒤로 물러서자 정주한이 자연스레 따라 들어와 문을 닫았다. “여기서 뭐하는 거야.” “응?” 나는 되물었다. 오히려 내가 해야할 질문이었다. 그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찬 바람을 맞고 여기까지 뛰어온 것처럼. 그는 추운지 몸을 떨었다. 방 안은 아직 난방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온도는 항상 더디게 올라 이불을 목끝까지 덮고 자야 겨우 잘 수 있었다. 나를 노려보는 눈은 원망으로 가득차 있었다. 도무지 따라가기 힘든 그의 감정선을 나는 포기하기로 했다. 벽에 기대 앉았다. 그는 앉지도 않고 방 안을 휙 둘러보았다. 손님방에서 신나 냄새를 맡던 날처럼 뭔가 적응되지 않는 눈초리였다. 좁아서 심장이 터져나가지는 않을까, 이 집 하나가 그가 혼자쓰는 방과 비슷한 넓이였다. “너 나한테 온다고 했잖아. 그래서 기다렸어. 안왔지.” “......” “어디갔나 했더니 이런데 처박혀 있는거야?” “내가 그랬었나?” 눈을 비볐다. 방 안이 건조해서 그의 얼굴이 뿌옇게 보였다. 목사의 장례식부터 시작해 도통 현실감이 없었다. 정주한과 언쟁할 기분이 아니었다. 마을을 벗어난 후 처음으로 S와 재회했다. 실컷 얻어맞는것보다 더 참혹한 만남이었다. 그 안락한 태도가 모든 것을 병적인 상태로 뒤바꿔 놓았다. 병든 것은 나 혼자였다. “내가 그.랬.었.나?” 그가 또박또박 반복했다. “너희 집으로 가자고 귀찮게 할 것 같아서 그랬나봐.” “뭐?” “...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어.” “귀찮아? 반장 침대에 붙어서 매일 있는 건 즐겁고?” “즐겁지는 않았어.” 벽에 등을 기대고 있는것마저도 하기 싫었다. 모든 나사가 빠져버린 듯 나는 자꾸 바닥으로 미끄러져 내리려는 몸을 억지로 지탱했다. 정주한이 가까이 다가왔다. 머리카락을 움켜쥐지 않을까 했는데 그는 내 팔을 잡았다. 돌아가자, 그 손은 나를 끌어내고 싶어했다. 그를 만나서 반가운가. 싫은 것은 아니었다. 죽은 이와 그를 보내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루종일 기도와 눈물과 명복을 비는 일의 반복이었다. 반면 정주한은 살아서 나를 향해 있었다. 꺾이지 않을 생동이었다. “여긴 어떻게 찾았어?” “네 집에 가서 어머니한테 물어보고 알았지. 누가 죽었다며. 조문갔다고 그러더라.” “응.” 나는 코트 앞을 풀어 속에 입은 옷을 보여줬다. 최대한 검은 색으로 찾아입었지만 완전히 검은빛은 아니었다. “개념없는 자식. 그게 네 눈엔 검은색이야?” “목사님은 별로 상관안하는 분이었어. 항상 겉보다 속이 중요하다고 그랬어. 마음이 중요하다고.” 그의 눈은 의문으로 가득차 있었다. 마음이 중요하다고, 내가 그런 공염불 같은 말을 읊을 자격이 있을까. “대체 내가 왜 여길 왔지.” “화나서.” “나한테 찾아 온다고 했으면서 왜 안와. 왜?” 그가 내뱉는 말은 자조적이었다. 그 질문에 나는 답을 갖고 잊지 않았다. 애초부터 그런 건 없었다. 바닥은 점점 따뜻하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의 화난 목소리엔 자장가같은 낮은 울림이 있었다. 섹스 전 한껏 고조된 흥분의 기운도 함께 느껴졌다. 노을이 사라지기 전에 불을 켜둘걸 그랬다. 좁은 방 안이 컴컴하게 어둠으로 가득찼다. 어둠이 그의 이마와 눈동자만 남겨둔 듯 눈빛이 묘했다. 나를 탓하는 것 같기도 하고 스스로를 질책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가 아연한지 실소를 흘렸다. “너랑 헤어지고 장유미한테 갔었지. 뭔가 잘못 됐으니까 바로잡고 싶어서. 여전하더라. 여전히 자극적이야. 보면 쓰러트려서 같이 자고 싶은 기분이 들게 만들거든. 그런데 그냥 돌아왔어. 어디도 갈 수 없어서 여태껏 집에 박혀 있었어.” “......” “모르겠다. 내가 여길 왜 왔는지.” “......” “... 네 얼굴 보려고 여기까지 오다니 아무래도 내가 정말 미친 거 같다.” 바닥에는 보일러 호스가 연결되어 있었다. 가만히 귀를 대보면 물이 흘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뜨겁게 대워진 온수가 방 전체를 돌고 있었다. 나는 코트를 벗어 한 쪽에 개어두고 바닥에 누웠다. 오래 쌓인 피로가 나를 허물어트렸다. “졸려.” 그는 내가 하는 짓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도무지 참을 수 없는지 얼굴을 감싸쥐고 신음 비슷한 소리를 냈다. 머리와 몸이 일치되지 않는데 대한 한계였을 것이다. 시무룩해졌다더니, 다시 화가 솟구치는 단계로 접어들었나. 숨도 안쉬고 그렇게 누워있었다. 그의 포기는 빨랐다. 그는 나가버렸다. 정주한은 여기까지 온 길을 더듬어 비포장 도로와 숲길을 헤치고 톨게이트를 통과하면 됐다. 여태껏 살아온 저택이라고 불러도 좋을 집과 잔디가 깔린 정원으로 돌아가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사치와 부유라는 단어와 꼭 맞는 친구들을 만나 어울리고 (그렇게 탐하던) 이제는 실증이 섞인 장유미를 품고 우월감에 젖는 편이 인생을 행복하게 하는 길임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나를 찾아 D시까지 내려왔다는 사실은 잊고 다시 만나면 나를 철저하게 무시해둘 준비를 하면서... 그렇게 차를 몰아 사라지면 되었다. 그 마지막 결심을 보지 않기 위해 나는 눈을 꽉 감고 잠을 청했다. 잘가. 정주한. 불이 켜졌다가 다시 꺼졌다. 누가 그랬을까. 잠 속에서 채 헤어나오지 못하면서도 밝고 어두움이 갈리는 것을, 그 찰나를 눈을 감고도 본능적으로 감지했다. 정주한이 가고난 뒤로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나는 천장을 향해 누워있었다. 조심조심 딛는 발소리가 들렸다. 발소리는 머리맡을 서성이다가 내 발치 아래로 향했다. 누군가 길고 숱많은 머리카락을 전신에 드리운것처럼 좋지 않은 예감이었다. 가늘게 뜬 눈으로도 볼 수 있었다. 발 밑에 남자가 앉아 있었다. 겨울인데, 반팔티셔츠를 입은 그 손이 내 쪽을 향해 쭉 뻗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순간 나는 잠이 확 달아나 깨어났다. 몸을 일으키면서 엉겹결에 잘못 딛은 손목이 삐긋했다. 아프다는 내색을 할 사이도 없이 나는 그림자처럼 발치를 지키고 있는 S를 발견했다. 내가 움직일때마다 각도를 맞추듯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방의 끝과 끝에 앉아있어도 숨이 막혔다. 그가 끝도 없이 길어지는 손을 뻗어 입을 틀어막을 것 같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절로 입을 가렸다. “뭘 그렇게 놀라?” “......” “아까 낮에 인사했잖아. 꽤 성실한 아버지 같았지?” 그가 몸을 낮추고 웃었다. 품 속에서 준비해온 책을 꺼낼 것처럼 몸을 낮추고 다가왔다. 나는 현관 쪽을 보았다. 문이 열려있었다. 불청객은 틈을 놓치지 않았다. “생명은 참 오묘해. 그렇지?” “......” “두려움을 이기는 방법도 여러 가지지. 나는 모두 극복했어. 돌아온 걸 보니 은혁이 너도 그런가?” 아까부터 그는 내 잠든 얼굴을 보고 있었을 것이다. 얼만큼 상했나를 관찰하면서, 자신이 내게 남긴 공포를 감상하고 싶어 다시 돌아왔다. 낮은 그의 가면에 불과했다. 나고 그 가면의 영역에 속하는 인간이었으면... 그랬으면... 덫에 걸린 동물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숨통을 끊는 순간처럼 S가 목을 움켜쥐었다. “숲에서 살아나서 그 후로 나 말고도 남자와 관계를 가졌나?” 나는 그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기름진 얼굴을 타고 흰 타액이 흘러내렸다. 칼이 있다면 그를 죽일 것이다. 아니 죽이지 못할 것이다. S의 딸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작은 몸과 만지면 녹아내릴 부드럽고 연약함을. S는 내 몸에 손을 대면서도 나를 금욕적인 눈으로 보고 있었다. 신은 계속 시험을 주시지. 하나를 통과했다 싶으면 또 하나를. 그렇지? “여기서 날 기다리고 있었지?” “당신은 미쳤어.” 그가 자신의 페니스를 움켜쥐고 위 아래로 몇 번 흔들었다. 그것이 똑똑히 보였다. 아, 또 다음 순간은 폭력인가. 내가 버둥거리자 S는 더 범하고 싶은 욕구가 치받혀오르는 듯 힘이 세졌다. 그가 얼굴에 뿜어내는 숨이 탁했다. 탐한 다면 뺏기는 것은 쉬웠다. 무력해지는 순간은 쉽게 왔다. 밀어내도 밀려지지 않아 이가 악물어졌다. 힘이 점점 앗기면서 바지가 반쯤 벗겨졌다. 그가 내 몸위로 올라오는 순간 나는 반쯤 울음을 흘리면서 물었다. “... 딸 이름은 뭐예요?” “뭐?” 그의 일방적인 시선이 아니라면 내가 바라보는 일은 드물었다. 빛이 없는 곳에서의 S의 얼굴은 다시 파괴욕구로 가득차 있었다. 잠시 후에 있을 어떤 쾌락에 몸이 달아 있었다. 근엄하게 위장하고 있지만 숨길 수 없을 것이다. 간파해내는 것은 쉬웠다. 하지만 아무 소용 없었다. 나는 위해를 피할 의지가 상실되어 있었다. 그는 멈칫했다. 이름을 물었을때 바로 대답을 하는 정상적인 반응, 그런 순진함은 S에겐 없었다. 요란한 차소리가 났다. 좁은 창 안으로 헤드라이트 불빛이 들어와 천장을 어지럽혔다. 흥이 깨진듯 S는 몸에 힘을 뺐다. 갑자기 목사의 호출이 있거나 예배 시간이 임박해있을때 그는 흐름을 끊고 일어나 옷을 추스르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다시 정돈했다. 어둠 속에서 익숙하게 자기 모습을 본래대로 돌려놓고 거울을 통해 바닥에 누워있는 나를 보았다. 닦지 않은 거울엔 손자국이 무수하게 나있었다. 내 몸도 마찬가지였다. 이 모든 순서는 고정된 것이었다. 방을 나가 S는 아무 의심없이 세상을 살아가고 남은 나는 내 피해가 환각이 아니었는가를 의심해야했다. 단지 S가 나가기 전 문 안으로 정주한이 들어온 점이 달랐다. 그는 돌아왔다. S는 거울을 통해 정주한을 보고 있었다. 그는 빠짐없이 옷매무새를 다잡고 나서야 등을 돌렸다. 정주한은 낯선 사람이 있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서로 얼마쯤 경계를 하다가 그 자리에 없는 것처럼 외면했다. 나는 벽에 기대 앉아 버클을 채우려고 했다. 손이 떨려서 제대로 되지 않았다. S가 다시 내게 몸을 드리웠다. 그는 몸을 낮추고 익숙하게 버클을 채워주었다. “제대로 입어야지.” 그의 손가락이 닿으면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방금 전 내가 침을 뱉은 그 얼굴은 다시 깨끗하게 돌아와 있었다. “오늘 수고했어. 여러가지로.” S가 나갔다. 문소리가 공허하게 울렸다. 둘만 남아도 이상하긴 마찬가지였다. 뭔가 열어봐서는 안될 것을 연 것처럼 그의 얼굴은 굳어있었고 나는 장판에 손톱자국을 냈다. S가 가고 나면 거울을 닦으려고 했다. 막상 그가 가고 나자 그럴 의욕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시계의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가 특 특 신경을 건드렸다. “저 사람 왠지 기분 나빠.” 한참만에 툭 내뱉는 말. 내게 동의를 바라고 있었다. 단어는 머릿속에서 엉키고 몸은 미세하게 떨렸다. S는 갔지만 그 기운이 남아 나는 한 마디도 말이 나오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온 몸에 힘을 꽉 주고 있었다. 긴장이 풀리면서 우울함이 파고 들었다. “왜 다시 왔는지 안 물어봐?” “뭐...” “......” “뭐 두고 갔어?” 내 대꾸에 정주한은 짧게 욕설을 뱉곤 거실로 나가 전화통화를 했다. 부모에게 하루 자고 올라간다는 내용이었다. 굳이 허락 맡을 것도 없이 그에겐 언제나 선택권이 있었다. 이게 싫어지면 또 다른걸 택할 수 있다. 미닫이문 뒤에서 하는 통화는 간접적으로 자기 의사를 전달하고 있는 것 뿐이었다. 미닫이문은 꽤 빈번하게 떨어져 나가곤 했다. 실수로 문에 부딪히거나 하면 유리가 다 깨지는 것처럼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좁은 집에서는 행동을 조심하지 않으면 금세 반성해야할 일들 투성이었다. 모두 부모님의 기준에서... S는 내 버클을 채우면서 의도적으로 가슴과 배를 슬쩍 슬쩍 건드렸다. 교묘한 손길이었다. 쫓던 먹이를 입 안에 넣고 다 삼키기 전에 입 속에서 굴려보는 것과 같았다. 맛있을지 없을지를 가늠하면서. 그는 오래전에 이미 나를 삼켰다. 삼키고 토했다. 내 몸은 그의 타액으로 녹아들었다. 그 성감대를 되새겨 보면서 훑어대는 손길에 소름이 끼치면서 숨길 수 없이 발기했다. 정주한은 차에 가 있을까? 라고 물었다. 나는 가지 말라는 뜻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는 등을 보이고 누웠다. 새벽 두 시. 배고 잘 것이 없어 자기 팔을 배고 누운 정주한의 뒷모습이 낯설었다. 서랍장을 열어 뭔가 배고 잘 것을 찾아 보았다. 이사갈 때 버리고 간 잡동사니들로 채워져 있을뿐 적당한 것이 없었다. 처음 알게 되었을때 이런 밤이 있으리라고 생각지 않았다. 그는 섹스하고 나면 더 지체하는 법도 시간을 끄는 법도 없이 바로 떠나갔다. 납득하기 힘든 일들로 일상이 채워지고 있었다. 반장의 투신, S의 태도, 정주한이 다시 돌아온 일도 그랬다. 내일 아침이 올 때까지 그가 내 곁을 지키고 있었으면 한다. S는 타인이 있으면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처음으로 어렴풋이 알았다. 누구든 곁에 누워 있으면 어둠이 덜 무섭다는 사실을.. 잠은 다 깨버렸고 나는 어느새 자세를 고쳐 천장을 향해 누운 그를 바라봤다. 시간이 흐르는 것과 비례하여 잠도 깊어졌을 것이리라. 이 위치에서 어머니의 잠든 얼굴은 자주 보곤 했다. 자는 사람은 내게 아무런 위해도 가하지 않았다. 정주한은 편안한 얼굴이었다. 무릎을 모아 턱을 괴고 그의 감은 눈을 그리고 코를 꽉 다물어진 매를 유심히 보았다. 그가 다시 돌아와 이렇게 옆을 지키는 것이 좋았다. “생긴게 이상해?” 갑자기 그의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그는 눈을 뜨고 천장을 응시했다. 잠의 기운은 없었다. “신기하다는 듯이 보고 있었지. 아까부터.” “.......” “야맹증이냐.” 야맹증은 밤에 잘 안보이는 증상을 가리켰다. 그의 단어선택은 어긋났지만 어떤 의미에선 적절했다. 제대로 보이지 않는 것처럼 나는 그의 얼굴에 빨려들어 눈을 떼지 못했으니까. 조금의 틈도 없는 얼굴이었다. 그가 몸을 일으켜 앉으며 내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정말 잠 안 온다.” “.....” “아까 뭘 두고 갔냐고 했지?” “.....” “두고 갔어. 너를.” “그 말은 틀려. 여기 우리 집이야. 나 태어났을때부터 살았던 곳.” 그는 곁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고 있던 자신의 휴대폰을 집어 던졌다. 휴대폰이 정확히 가슴팍에 맞으면서 다리 사이로 떨어졌다. “니가 날 제일 열받게 하는 게 뭔 줄 알아? 항상 뻔한 얘기만 해. 하지 않아도 좋을. 그거 뿐이야.” 나는 그가 놀랄만한 이야기를 몇 개쯤은 지니고 있었다. 하나는 저번에 터트렸다. 새아버지에 관련된 이야기에 그의 반응은 격했다. 나를 국도에 버리고 떠났다. S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면 그는 나를 어떻게 할까. 미처 내가 생각을 다 끝내기도 전에 그가 무릎걸음으로 다가와선 목덜미를 움켜잡아 자기 쪽을 보게 했다. “뭘 두고 갔느니 그런 헛소리는 지껄이지마.” “......” “알면서도 일부러 다른 말만 하잖아. 넌 내가 왜 돌아왔는지 알고 있어.” “몰라.” 나는 그의 얼굴을 밀어냈다. 밀리지 않으려 버틸수록 그의 몸이 더 가까이 와서 붙었다. 그의 몸에 내 몸이 반쯤 얽혀들었다. 알고 있잖아. 난 도저히 못하겠으니까 니 입으로 대신 해 줘. 거친 말투와 달리 그의 눈은 간절했다. 빨리. 그가 내 몸을 흔들어댔다. 어머니의 얼굴에 서려있던 일말의 한기, 그 우수를 그의 얼굴에서 발견했다고 착각하고 안도한 것은 무모한 짓이었다. 그가 왜 왔는지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입 밖에 내지는 않을 것이다. “... 발정 때문인가? 여기 오는 길에 개 축사가 있어. 한 번 발정나면 다 쏟아낼때까지 아무나 붙잡고 흔드는거야. 그게 다야.” 나는 그를 개에 비유했다. 더럽다고 욕했다. 그러나 내 배에 닿아있는 그의 손은 주먹의 형태로 뭉쳐들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절래절래 젓다가 이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손바닥으로 내 뺨을 가볍게 쳤다. “그래. 맞아.” 그는 입술을 살짝 이죽거리다가 내 얼굴에 갖다댔다. 내가 얼굴을 돌려 거부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는 갈증이 풀릴 때까지 키스했다. 그는 옷을 걷어 올렸다. 단단한 가슴팍이 드러났다. 핥아봐. 핥아줘. 나는 어둠 속에서 혀를 내밀어 그의 피부를 핥았다. 동시에 죄고 있던 힘이 느슨해지고 부드러워졌다. 그가 탄성 비슷한 소리를 내면서 뒤로 누웠다. 그의 몸 위로 엎드려 나는 움직임을 멈췄다. 그는 여기 왜 왔는가.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초초하게 뛰는 그의 심장소리가 들렸다. 초침 보다 더 빨리 그의 맥이 뛰고 있었다. 더 이상 다른 무엇을 원하지 않고 그는 그대로 누워 있었다. 너무 적막해서 먼 곳의 소리가 더 잘들리는 밤, 왼쪽 귀에는 정주한의 맥 뛰는 소리가 오른쪽 귀로는 벽 너머 세상의 미세한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뜨거운 물을 가득 욕조 안에 받았다. 욕실은 모든 부분에 미세하게 금이 가있었다. 벽도 세면대도 욕조도 그랬다. 살이 데일만큼 뜨거운 물을 틀어놓고 하나씩 옷을 벗는데 살펴볼 때마다 언제 생겼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작은 상처들이 몸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맞을 때마다 때린 사람의 이름이라도 펜으로 써놓아야 할까. 나는 옷을 아무렇게나 벗어두고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수증기가 가득차 천장에서 물이 얼굴로 툭툭 떨어졌다. 그가 문을 두드렸다. “대답 안하면 그냥 연다.” 문이 열리자 찬 공기가 조금 드러난 어깨에 닿았다. 나는 몸을 더 깊이 담궜다. 그는 욕조 안에 있는 나를 발견하자 비스듬하게 몸을 돌렸다. “여기... 아무것도 없어. 냉장고도 비었어. 뭐 먹고 싶은거 있으면 말해. 사러갈 거니까.” “.....” “없어? 없으면 그냥 간다.” “아이스크림.” 갑자기 왜 아이스크림이 생각났는지 스스로도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도 안닫고 그는 가버렸다. 나는 물 속에 얼굴까지 푹 집어 넣었다. 삶은 달걀이 되듯 뜨거운 물 속에서 몸이 편안해졌다. 예전 공중 목욕탕의 넓은 탕 속에 들어가 눈을 뜨면 물 속의 그 뿌연 풍경이 좋았다. 바로 이마 위로 찰랑대는 수면의 얄팍함 때문에 좀 더 깊었으면, 좀 더 깊었으면 속으로 얼마나 되뇌였던가. 아버지는 탕 속에 들어가서 내가 질릴때까지 놀도록 두고 혼자 목욕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베풀어준 애정은 그 정도였다. “카드가 안되서 얼마 못샀어.” 근처에 있는 가게는 한 군데 뿐이었다. 같이 갈 걸 그랬나. 카드는 당연히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것이다. 가끔 과자나 사러갈 때 들를 뿐 물품이 많지 않은 가게였다. 장사하는 사람도 큰 야망이 있어서 하는 건 아닌터라 유통기한이 지난 물건들도 먼지 속에 쌓여 있곤 했다. 그가 사온 것은 빵과 주스 그리고 아이스크림이 전부였다. 아이스크림은 바닥에 내려놓자마자 금세 녹는 것처럼 흐물거렸다. 집에 있어도 주로 혼자 많은 시간을 보내기 때문에 누군가와 함께 마주보고 단 둘이 밥을 먹는 것 자체가 이질적이었다. 어쩐지 어색해서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렇게 많이 사오라고 한 건 아니었는데. 냉장고가 냉동이 안돼.” “그럼 하필 왜 아이스크림 사오라고 해. 들고 올때 손시려 죽는 줄 알았는데.” 이 집엔 제대로 갖춰져 있는 것이 없었다. 사람이 살 때도 그랬지만 없을 때는 더 했다. 어제는 잘 돌아가는 것 같던 난방도 갑자기 고장이 났는지 뭔가 이상해져 있었다. 떠나라고, 네가 있을 곳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것일까. 휴대폰이 울렸다. 그의 전화소리가 아니었다. “아까부터 울리더라.” 코트 주머니를 더듬어 휴대폰을 꺼냈다. 부재 중 통화가 두 건이나 찍혀 있고 계속 전화가 오고 있었다. 어쩐지 내키지 않아 받지 않았다. 그는 내 휴대폰을 주시하고 있었다. 휴대폰은 저절로 꺼졌다. 꺼지는 것과 동시에 초인종이 울렸다. 문을 열자 대문 앞에 선배가 있었다. 그가 집까지 온 것은 처음이었다. 정주한이라는 의외의 인물이 방 한 곳을 차지하고 있지만 선배는 별로 개의치 않고 나에게만 얘기를 쏟아냈다. “전화 안받길래. 집에 가버린 줄 알았지.” “미안해요. 형. 코트 속에 있어서 전화 온 줄 몰랐어요.” “난 오늘 올라 가. 자릴 오래 비워둘 수가 없어서. 넌 언제 가?” “.......” 나는 쓰게 웃었다. 돌아간다는 날짜에 대한 개념은 없었다. 생각하지 않았다. 이 곳도 내가 입학해야할 학교가 있는 서너 개의 도시도 날 들뜨게 하지 못했다. “정해놓지도 않고 내려오다니 역시 대학생은 좋네.” “아직 아닌데요. 뭘.” 선배가 꼭 역까지 함께 가자고 청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나는 그래야할 것 같은 생각에 그를 따라나섰다. 추우니까 집에 있으라고 했지만 정주한도 뒤따라왔다. 선배가 부르지 않았다면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다. 모르는 사람과 아는 사람의 경계에 있는 그가 편했다. 군중 속에 섞여 내 정체를 숨기고 있는 것과 같았다. 서로의 얼굴을 보고 있지만 (실체를 모르는) 선배는 많은 것을 알려하지 않았다. 목사의 죽음을 함께 고향 동생 하나가 필요했을 뿐이었다. 그가 하는 얘기는 주로 일상적인 것이었다. 기름값 폭등 가끔 주유소로 찾아오는 미녀, 그런 소소한 이야기가 편했다. 바람이 우리 쪽으로 불어왔다. 코트깃이 아무렇게나 젖혀졌다. 로션을 바르지 않은 얼굴이 쓰라렸다. “지금이 몇 월이죠?” 나는 별 의미없는 질문을 던졌다. 겨울은 눈 오는 날과 눈이 녹는 날로 나뉘어져 있었다. 어느 때이고 똑같이 추웠다. 선배는 날짜까지 정확히 짚어 알려주었다. “휴가가 하루만 더 있었으면 좋겠어. 친척이라고 했으면 한 이틀 더 줬으려나. 빌어먹을 사장. 그 자식 얼굴만 봐도 토나올려 그래. 아, 올라가기 전에 사택에 한 번 들러라. 사모님이 뭐 줄 거 있다고 꼭 오래. 전해 달랬어. 안가면 나 욕먹으니까 꼭 들러라.” 도시로 가는 표를 끊고 선배는 나와 정주한 모두에게 악수를 청했다. “아 주유소.” 이미 역까지 걸어오는 동안 알고 있었으면서 정주한은 처음 알았다는 것처럼 덧붙였다. 역에 도착해 셋이 한 공간에 있을때야 선배는 그와 자신이 구면임을 눈치챘다. 선배는 정주한의 얼굴보다 그의 차를 더 선명히 기억할 것이다. “다음에 만나면 기름이나 많이 넣어주세요.” 선배는 헛웃음을 웃었다. 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는 정주한을 무시하고 내 쪽을 보았다. 눈동자에 실망의 빛이 있었다. 무엇에 대한 실망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완전히 짚어낼 수 없지만 어린 나이에 비싼 차나 끌고 다니는 족속과, 그 사람이 찾아온 이가 나라는 것. 그리고 어느 쪽에도 확실히 의사를 표하지 않고 이리저리 피해다니고 있을 뿐인 질시는 아닐까. 나는 그가 올라 탄 버스 창까지 쫓아 갔다. 선배는 검게 탄 얼굴은 그간의 타지 생활의 고생으로 얼룩져 있었다. 그는 짧고 형식적으로 손을 흔들곤 커튼을 휙 쳤다. 선배가 탄 고속버스가 매연을 뿜으며 사라지는 것을 오래도록 보았다. 그가 가고나서 나는 몸을 돌려 정주한의 얼굴을 보는 것이 겁났다. 그 얼굴을 바라보고 일말의 황홀을 느끼면서 휩쓸려 갈 스스로가 두려웠다. 입과 혀에 어젯밤 그의 피부의 감촉이 남아있는 것 같아 나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기름이나 넣어 달라고 할 때 니 얼굴 어땠는 줄 알아. 정주한 이 나쁜 새끼 넌 정말 안돼. 최악이야. 딱 그 표정이었지.” “... 알면서 왜 그랬어.” “일부로 그런거 맞아. 나도 가려서 할 말 정도는 알아. 자기 직업에 대해 자부심이 없는 사람에겐 그걸 건드리는게 가장 아킬레스건이라고 삼촌들이 항상 그랬지.” “......." “언제는 니가 다른 눈으로 날 봐준 적은 있어? 넌 틀렸어, 그 표정 뿐이었어.” 그의 말 속에서 자주 살아 움직이는 삼촌들의 얼굴이 보이는 것 같다. 아마도 그와 닮았을 것이다. 투덜대는 그를 두고 앞서서 걸어갔다. 농촌, 흙밭, 낯익은 사람들. 집으로 가는 길목에 십여마리의 개를 키우는 사육장이 있었다. 군청색 모포에 반쯤 덮인 개 우리까지 걸었을때 나는 매우 지쳐있었다. 우리 밑으로 철망에 갇힌 개가 눈을 꿈뻑이고 있었다. 발정도 일으키지 못할 무기력한 모습이었다. 겹 겹이 몸을 포갠 채 이 쪽을 향한 눈, 낯선 사람이 접근하자 힘없이 짖었다. 철망 밑 나무 박스 안에 새끼 한 마리가 들어 있었다. 한 눈에 보기에도 병이 들어 눈에 눈꼽이 잔뜩 낀 개였다. 상자 밖으로 발을 내밀고 반기는 기색을 했다. 나는 개를 품에 안았다. 털이 부드러워 안고 있기만 해도 따뜻한 느낌이 났다. 농기계를 손 보고 있던 주인이 우리 쪽으로 경계하면서 다가왔다. 사육장의 관리자는 내가 태어 나기 전부터 이 도시에 살았던 사람으로 청각장애인이었다. “... 어제 집 찾는데 혁혁한 공을 세우신 분이시네.” 그가 중얼거렸다. 나는 저 사람은 귀가 들리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가 직접 말을 하기 이전엔 섣불리 말하고 싶지 않았다. 통하지 않는 상대에게 말을 거는 행위는, 여기까지 나를 쫓아 내려온 그가 저지르고 있는 일이었다. 그가 내게 갖는 관심은 얼마나 갈까. 얼마나 길어질 수 있을까. 무모한 한 때의 휴가일 뿐이리라. 내가 품에 안았던 개를 내려놓자 다가오던 관리자가 사라졌다. 그는 내 팔을 잡고 주머니를 뒤져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고 뚫어져라 바라봤다. 자신이 선물한 휴대폰은 어떻게 했냐고 묻고 싶은 걸 꾹꾹 눌러참는 눈치였다. 그는 전화 번호를 찍어 통화버튼을 누른 후에 내 귀에 대주었다. 슈렉이 받았다. “전화를 했으면 말을 하세요. 뭐야 정말.” 신경질 적인 목소리에 나는 그냥 가만히 있었다. 전화가 끊어졌다. 그가 나도 외우지 못하는 집 전화 번호를 외우고 있다는 것이 이상할 뿐이었다. 그리고 내가 속해 있는 가정은 여전히 삭막하다는 사실을 한 번 더 확인했다. 하지만 이 곳도 아니다. 나는 어디로든 가야했다. 가기 전이라면 모든 것을 명확히 정리하는 것이 좋겠지.. 그렇겠지. 그에게 집에 가서 가방만 챙겨 차를 몰고 이쪽으로 오라고 교회 입구를 가르쳐 주었다. 워낙 작은 마을이라 별다른 지도 없이도 별로 찾기에 어렵지 않았다. 조금만 걸으면 모든 길은 다 통해 있었다. 나는 숲 길이 아니라 다른 방향의 지름길을 가르쳐 주었다. 숲은, 차로 지나간다고 할지라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무서우니까. 그 길을 정주한이 무심결에 스쳐가는 것도 싫었다. 목사의 아내가 준다는 물건만 받고 갈 생각으로 왔지만 교회 입구까지 와서도 망설여졌다. 어디서라도 S가 튀어 나올 것만 같아 몇 번이나 문을 두드리지 못하고 망설였다. 내리 쬐고 있는 햇빛과 한 낮이라는 시간이 차차 무서움을 덜어 주었다. 사택의 초인종을 누르자 목사의 딸이 맞아 주었다. 소녀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 가자 검은 옷을 입고 있는 목사의 아내가 반겼다. 지쳐있는 얼굴이었지만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거실에 앉아 있으니 딸이 녹차를 가져다주었다. 반 이상은 흘리면서 탔는지 잔이 가루로 더러웠다. “고마워.” 목사의 아내는 낡은 책 몇 권과 새 책을 함께 가져왔다. 죽은 목사가 정말 내게 이것을 주라고 했을까. 정말 주라고 말하기는 했을지 의심이 들었다. 낡은 책은 그렇다해도 새 책들은 하나같이 연작소설들이었다. S가 내게 주었던 소설의 뒤편이었다. 그가 선물한 책들은 하나같이 좋았지만 다음 권은 내 스스로 구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살 수 없어서가 아니라 그와의 기억이 연장되고 완성되어 굳어갈까봐 더 이상은 손댈 수 없었던 것들이다. “새 책은 애들 주세요. 전 이것만 가질게요.” 헌책만 집어드는 나에게 목사 부인은 굳이 나머지 책들도 쇼핑백에 넣어주었다. 나는 다시 꺼냈다. 받아들고 나면 펴보고 싶을 것이다. 펴보고 싶다는 생각과 그 앞권을 보았던 과정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것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책을 편 순간부터 더 생생하게 다가오겠지. S가 찾아오거나 S의 집으로 가거나 그가 쥐고 있는 책을 내 눈은 쫓았다. 몸에 익은 관계를 끝내고 얼굴이 눈물에 젖을 즈음이 되어서야 손에 쥘 수 있었던 책. 헐벗고 농락당하면서도 머릿 속엔 책의 구절구절이 채워진다고 믿었을까. 말미에 가서야 불현듯 떠오르는 그 아름다운 구절에 온 몸이 찢기고 있음을 알았다. 거절 하고 사택 밖으로 나왔을 때, 목사의 아내가 뒤따라 나왔다. S는 마당에서 창고로 무언가를 끌고 들어가고 있었다. 잘 훈련된 노역꾼처럼 그는 사택에 와서 일만 하는 모양새였다. 빨리 이 곳을 떠나야했다. 이 마을을,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 다짐하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야했지만 내 다리는 굳어 땅에 붙어버렸다. 그는 나무로 된 테이블을 나르지 못해 다리를 질질 끌고 한껏 힘든 기색을 보였다. 목사의 아내가 도와주려 하자 S는 혼자 할 수 있다면서 거절했다. “S 아저씨 허리 부러지겠다.” 현관입구에 나온 소녀가 장난스레 말을 꺼냈다. 명백히 도와주라고 분위기가 나를 떠밀고 있었다. 저 테이블만 옮기면 끝나는 건가. 책은 모두 두고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비척 비척 그 쪽으로 걸어가 테이블 끝을 잡았다. 그의 얼굴을 외면했다. S의 부인과 아이는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목사만 살아나서 예배를 집도한다면, 과거와 같았다. 그와 나는 창고로 들어가고 사택은 가깝지만 아득했다. 내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다. 창고 입구까지 테이블을 밀어 넣었을 때 나는 멈춰섰다. 조금만 더 도와줘. 그의 두 손이 테이블 모서리를 애써 안 쪽으로 잡아당기고 있었다. 나는 뒤를 보았다. 목사의 아내와 아이는 사택 입구에서 해를 쬐고 있었다. 추운지 발을 동동 구르면서 그녀가 내 쇼핑백에 뭔가를 넣고 있었다. 아마도 거부한 새 책을 몰래 넣는 것이다. “세게 밀어.” 창고는 불이 켜있지만 별로 밝지 않았다. 바깥의 햇빛, 추위와도 별개였다. 그와 그의 아이가 있을때 온전해 보였던 창고 안은 다시 그와 나의 단 둘만의 장소로 돌아와 있었다. “그럼 내가 하지.” 그가 자신이 맡은 모서리끝에서 벗어나 내 쪽으로 다가와 테이블을 안으로 밀기 시작했다. 테이블은 잘 밀리지 않았다. 그의 뒷 모습을 내려다 보았다. 그와 함께 있을 때 우리는 서로 뒷모습을 더 많이 보여줬다. 그는 나를 완전히 지배하고 장악했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나를 두고 가버렸다. “좀 도와달라니까. 뭐가 그렇게 비싸.” 흘흘 웃으며 그는 몸을 돌려 나를 흘낏 보았다. 그가 창고문을 걸어닫았다. 창고문을 닫는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내 얼굴은 멍하고 바보같았을 것이다. 창고문이 닫히자 빛이 단절되고 먼지가 미세하게 공중을 떠나니고 있는 것이 보였다. 창고 바깥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목사의 딸이 자신의 어머니에게 뭔가 떠드는 소리였다. 예상을 거스르지 않았다. 그가 내 얼굴을 후려쳤다. 오랫동안 별려온 폭력이었다. 순식간에 마음이 싸해졌다. 한 때의 호감과 교감 같은 것은 그의 안중에 없었다. 그가 나를 보고 떠올리는 것은 오직 굴욕 뿐이었다. 처음처럼 순순한 얼굴을 보니 더욱 냉정하고 근엄한 얼굴을 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S는 맨 처음 나를 보았을 때부터 그 생각만 했을까. 일이 안풀려 내려온 김에 순진한 처녀를 범하듯 단순히 갖고 놀고 싶단 생각 뿐이었을까. S. 당신은... <블로뉴 숲의 여인들> 에 등장한 장에게 내 마음을 뺏긴 순간부터 나는 스스로 여자가 아니라 남자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는 처음 그를 좋아했다. 그와의 첫 교감이 사랑이었다고 혹은 사랑이 아니었다고 누가 정의할 수 있을까. 그와 단 둘이 되는 순간을 두려워하면서도 언제나 S는 내 머릿 속에 있었다. 이 순간을 회피하고 싶으면서도 의문이 자꾸만 커져 창고를 나갈 수 없었다. 미친 듯이 묻고 싶었다. 당신은 나에게 왜 그랬어. 일말의 애정도 없이... 정말 그 뿐이었어? 한 번도 나를 보살펴 주고 싶다거나 잘해주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어? 왜 하필 나였어. 왜 하필 나였어. 왜 ... 그가 뒤에서 나를 끌어 안았다. 별로 버둥거리지 않았는데도 행동은 더 없이 거칠었다. 그는 창고의 창가 까지 나를 밀어갔다. 먼지와 얼룩으로 더럽혀진 유리창이었다. 유리창에 턱이 세게 부딪혔다. 나는 유리를 부수고 나가지 않기 위해 창턱을 붙잡았다. 그는 옷 아래로 손을 넣어 몸을 더듬었다. 어제 미수에 그친 것을 보상 받기라도 하듯 살점을 뜯어낼 기세였다. S는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체위와 감각을. 그는 내 다리를 벌리게 하고 추행하고 또 추행할 뿐이었다. 사택 앞으로 정주한의 차가 와서 서는 것이 보였다. 한 눈에도 그의 차는 도드라지는 풍경이었다. 더러운 얼룩 사이로 그의 얼굴이 언뜻 언뜻 보이는 것도 같았다. 빛을 받아 정결했다. 창 옆 선반에 공구가 있었다. 나는 손을 뻗어 그것을 집어 S의 팔을 격하게 찔렀다. “......” 아무 소리도 없이 S가 주르륵 뒤로 물러났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뭔가에 찔려 흠집이 난 자기 팔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얼굴을 들지 않아도 보였다. 이를 악물고 그가 웃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흐흐흐 소리를 내면서 나를 올려다 보았다. 표정 없는 눈이 내 몸을 훑었다. 내 손에 쥔 공구는 무엇인가. 날까롭고 날이 서 있는 이것은. 그의 팔에서 피가 뚝뚝 흘렀다. 좀 많이 난다 싶더니 이내 급격한 속도로 푹푹 솟기 시작했다. “괜... 찮아요?” “... 선반 위에 흰 상자를 꺼내봐. 붕대가 있어.” 그가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턱으로 선반 쪽을 가리켰다. 나는 선반 가장 윗칸에 있는 흰 상자를 끄집어 내렸다. 터무니 없이 무거운 상자 안에 약병이 가득차 있었다. 그가 내 입에 흘려넣어 주었던 것과 같은 종류의 농약이었다. 나는 상자 채로 그것을 쏟아버렸다. 바닥에 떨어져 깨진 유리병에서 농약이 줄줄 흘러 내렸다. 흘러갈 방향을 찾지 못해 이리저리 하나로 모여괴여 들기 시작했다. “은혁. 네 집에 가정방문이나 갈까? 나 너희 집도 학교도 알아.” 그가 내 이름을 발음했다. 발음은 정확하고 또렷했다. 초월한 사람들이 있다. 도시에서 만난 김수영이 불안과 고통을 빗겨갔듯 S에게 이미 내게서 없어지지 않을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날뛰지도 않고 조용히 숨통을 조여왔다. 그가 죽어버린다해도 이지러진 감각은 회복되기 어려울 것이다. 그를 찔러놓고 나는 울고 있었다. 아무래도 극복하지 못할 것 같아... * 창고를 벗어나 그의 차에 올랐다. 목사의 아내가 주는 쇼핑백과 그 밖의 것들을 내 의지와 상관없이 그의 트렁크에 들어갔다. D시에서 멀어졌다. 창 밖만 줄창 보고 있는 내 표정이 끔찍한 탓인지 정주한은 섣불리 말을 꺼내지 않았다. 어디를 프레임으로 삼아 찍어도 퇴색한 풍경들만 찍히는 D시였다. 전원이라는 단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그 곳을 벗어나면서 나는 어서 도시의 불빛이 보이기를 바랬다. 시커멓게 하늘을 메우고 있는 전선과 전봇대들 그리고 커다란 간판, 그리움 때문이 아니라 지금은 그런 풍경들이 간절히 필요했다. 마을에서 나가는데까지는 비교적 빨랐지만 도시 진입로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주유소에서 그가 차를 세우고 기름을 채웠다. 멀리서 주유소 아르바이트생에게 뭔가 말하고 있는 그를 보면서 나는 가방을 챙겼다. 멀리 보이는 커다란 표지판 밑에 버스 터미널이라는 안내판이 있었다. 이 도로를 쭉 따라 가면 나올 것이다. 안 나온다고 해도 상관 없었다. 정주한이 한참만에 차 문을 열자 찬 공기가 함께 밀려 들어왔다. 그는 커피 캔을 내밀었다. 나는 받지 않았다. “나 여기서 내린다.” “뭐?” “혼자 갈게.” “너 여기가 어딘줄 알고 하는 소리야?” 내가 내리려고 차 문을 잡자 그가 못내리게 팔을 잡아당기면서 차 안으로 들어왔다. 말이 통하지 않다고 판단했는지 그는 내가 손에 쥐고 있던 돈을 뺏어 바닥에 던져버렸다. 되찾으려 했지만 한 장도 뺐을 수가 없었다. 그가 거칠게 움직이는 바람에 가방에서 펜이 굴러 나와 차 바닥에 한꺼번에 흩어졌다. “헤매고 있는데 의리없이 혼자 간다는 말이 나와?” “길... 잃어 버렸어?” “이 길이 맞는 거 같은데 갈수록 아니란 말야.” 그의 뺨 한 쪽이 약간 붉어져 적잖이 당황하고 있었다. 차가 움직이자 붉고 푸른 펜이 점괘처럼 바닥을 굴러다녔다. 시외 버스터미널 팻말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주섬주섬 바닥에 떨어진 구겨진 지폐를 주웠다. “그래도 내리고 싶어.” 그가 어이가 없는지 스스로 유리창에 몇 번 머리를 가볍게 갖다댔다. “... 집에서 출발하면 찾을 수 있는데 거슬러 가면 잘 못해. 운전한지 얼마 안되서 다녔던 길 아니면 잘 몰라. 그러니까..." "......" "그러니까 도와줘.” 좌석 앞에 있는 수납장을 열었다. 빳빳한 새 지도가 챙겨져 있었다. 나는 바닥을 굴러다니는 붉은 펜으로 현재 위치를 표시해 보았다. 지도를 보는 건 지리 수업 시간 이후로 처음이었다. D시에서 그가 보여 준 행동이나 내가 경험한 일 모두 대학 입학을 압둔 스무살 짜리들의 것은 아니었다. 지금 길을 잃고 지도를 골똘히 바라보고 있는 것은 그나마 어린애들 같아서 조금 마음이 가벼워졌다. 지나가는 사람이 적어 길을 물을 수도 없고 지도도 팻말도 미로 같기만 했다. 애초에 붉은 표시는 어디로 가버리고 점점 길을 잘못 들었다. 눈 앞에 도시를 가로지르는 강보다 더 크고 깊은 강이 나타나자 그가 차를 세웠다. “완전히 반대로 온 거 같아.” 우리는 차에서 내려 다리 위에 섰다. 사방에서 끊임없이 흘러가고 있는 강물을 내려다 보았다. 거대한 물줄기에 햇빛과 그늘이 동시에 드리워져 있었다. 배운대로라면 이 근처에 거대한 댐이 있을 것이다. 밤이 되기 전 푸른 색과 보라색이 섞여 공기를 떠나니고 있었다. 이 시간은 금세 사라질 것이다. 주변에 군부대가 있는지 심심찮게 뒤집어진 붉은 글씨의 경고판과 철조망들이 있었다. 철조망을 손으로 하나씩 잡으면서 앞으로 걸어갔다. 십 분 가량 걸었을때, 야생 수목원이 나타났다. 타원형 창을 가진 식물원이었다. 방문객은 아무도 없고 문은 열려 있었다. 우리는 안으로 들어갔다. 식물들이 천장에 매달려 있기도 했고 바닥에 심어져 있기도 했다. 시작은 유리로 되어 있었지만 안으로 들어갈 수록 자연 상태 그대로였다. 처음 보는 식물 이름들이 이어져 있었다. 뒤에서 따라오고 있는 그에게 계속 전화가 걸려왔다. 부모에게서 김수영에게서 그리고 토플 학원에 등록해 놨다는 김중규까지... 풀들이 많은 지대에 이르렀을 때 통화를 하고 있는 그를 두고 나는 점점 속도를 빨리 했다. 그의 모습이 멀어지다가 이내 보이지 않게 되었다. 나는 유리로 사방이 막힌 실내 식물원 안으로 몸을 숨겼지만 의미없는 행동이었다. 겨울은 밤이 더 금방 왔다. 날이 빠르게 저물고 있었다. 우리가 종착지로 삼은 지역은 예상대로 주위에 댐이 있어 작은 관광지였다. 몇 개의 모텔들이 쭉 이어져 있었고 심심찮게 식당들도 있었다. 그는 어렵게 찾아낸 현금 인출기에서 다량의 돈을 뽑아냈다. 돈을 갖고 나자 상당히 마음이 편해지는지 만족해서 이것저것 사주었다. 식당으로 들어가자 나체의 여자들 사진으로 벽이 도배 되어 있었다. 여기 사람들은 이런걸 보면서 즐거워 하는 건가. 벗은 여자의 몸을 보면 정주한은 감흥이 일지 몰라도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저 피부가 지나치게 희다는 느낌 뿐이었다. 길을 잃어 여기까지 왔지만 완전히 잃고 나니, 애초 이 곳으로 오기로 했던 것처럼 마음이 가라앉았다. 술을 주문해서 반 쯤 마셨을 때, 정주한이 의외의 이야기를 꺼냈다. “예전에 이런데 와본적 있어. 다섯 살 때였는데 유괴를 한 번 당한 적 있었지. 집에서 일하는 아저씨의 친척이었는데 갑자기 과자를 사준다고 하더라.” “.......” “힘도 없고 바보같이 끌려 다녔는데. 기억에 의하면 이런 비슷한 데서 그 남자 혼자 밥을 시켜 먹던 기억이 난다. 여기가 거기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비슷해.” “많이... 놀랐겠다.” “무서웠지. 딱 죽는 줄 알았거든.” 그 때 기억을 되짚는 듯 그가 잠시 말을 멈췄다. 항상 뜻하는 대로 행동하고 뜻하는 대로 표정하던 그의 얼굴 한 쪽에 부쩍 음영이 어려 있었다. “돌아가는 길 삼촌한테 물어봤어. 찾을 수 있을 거 같아. 자신은 확실히 없지만.” “... 그 때 얘기 더 해줘.” “뭐? 유괴?” 그는 휴대폰이 또 울리자 배터리를 분리해 버렸다. “더 듣고 싶어?” “........” “취향 이상하네.” 그가 약간 술이 오르는지 가볍게 웃었다. “과자였나, 맛있는 걸 줬는데 평소 같으면 먹지 않는 종류였어. 선반에 쌓여있던 게 과자고 사탕이긴 했지만 엄마가 과자는 못 먹게 했거든. 이 썪는다고. 그래서 사탕 주는 아저씨를 따라 갔는데 차 타고 어디론가 실려갔지. 이런 식당에서 자기만 혼자 밥을 먹고 먹는 내내 나는 굶기더니 무슨 창고 같은 데로 끌고 갔어. 춥고 축축하고 아무튼 더러웠어. 그 남자가 나한테 집 전화 번호를 물어선 엄마한테 전화를 걸었는데 예상보다 일이 안풀렸는지, 화가 나서 내 목을 막 졸랐어. 조르다가 실수로 죽이면 돈을 더 못받겠다 싶은지 힘을 빼다가 다시 또 화가 나는지 조르고 죽을 것 같으면 풀어주고 그러다 내가 오줌을 싸니까 멈추더라.” 그는 자기 목덜미를 무심결에 쓸었다. “더 해?” “응.” “그만하자.” “그 다음은 어떻게 됐어..” “얘기해주면 뭐 해줄건데?” “......” “뭐든 들어줘. 그럼.” 나는 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턱을 괴고 미간을 미세하게 찌푸렸다. “흠. 내 옷을 전부 벗기더니, 목에 칼을 들이대는 거야. 피부가 제일 약한 부분이라 칼날에 막 상처가 나는데. 그 사람이 웃었어. 좋아하더라구. 그러다가 경찰이 와서 체포하고.” “......” “유괴 스토리 끝.”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말할 수 있지?” “......” “그런 얘기를. 아프고 괴롭지 않아?”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내 눈은 어느 정도 간절했을 것이다. 무서운 경험을 이겨내는 일이 어떻게 그에겐 더 쉬웠을까. “지나간 일이잖아.” “......” “지나갔잖아. 긁힌 상처도 이제 없어.” 그가 깨끗한 자기 목을 보라는 듯 괸 손을 치웠다. 울대 있는 곳이 깔끔했다. “유괴되고 한 달 정도는 말을 안했어. 그냥 할 말이 없더라.” 지금 그는 말을 잘한다. 겁내하는 것도 없었다. 말을 하지 않은 한 달의 시간 동안 그 안에 스스로 용해 되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부러웠다. 날이 빠르게 어두워지고 있었다. 겨울은 날이 빨리 어두워졌다. 나는 밤눈이 밝지 않아 어두운 거리를 걷는 것이 싫었다. “사실 이 얘기 친구들한테도 안했어. 처음 하는 거야. 이런 얘기 좋아하는 줄 몰랐네.” 좋아하는게 아냐. 오히려 두려우니까 자꾸 실체를 들여다보려고 하는 것 뿐이야. 그가 남은 술을 한꺼번에 다 입 속에 털어넣었다. 어차피 바로 돌아가기는 틀렸다. 모텔 방 하나를 빌렸다. 화려한 겉과 달리 불특정인들이 쓰다가 두고 간 머리카락이 붙어있는 이불과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수채화 그림이 덩그러니 붙어 있었다. “수영이가 보면 좋아하겠어. 저 그림. 갈 때 사갈까. 화내려나.” “분명히 화낼 거다.” "비꼬고 짜증내고... 안 봐도 그려져." 그가 옷을 훌훌 벗어버렸다. 옷을 벗는데 계속 같은 부분의 단추가 풀리지 않아 시간을 끌었다. 그는 허리에 손을 대고 내가 하는 꼴을 지켜보고 있다가 단추 푸는 것을 도와주었다. 하루 종일 틀린 지도 판독에 의지하면서 운전을 했지만 그의 얼굴엔 피곤한 기운이 없었다. 밑그림을 그리듯 그의 손이 내 배 언저리를 맴돌았다. 호흡이 그대로 노출되고 있었다. 아프게 하는 것보다 이렇게 만지는 것이 훨씬 더 내게는 상처였다. 간지러움이 일어 나는 몸을 뺐다. “친구끼리 뭐 어때.” 학원 폭력의 피해자와 가해자보다는 듣기 좋은 명칭이지만 우리가 친구인가? 정주한에게 있어 친구란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없었다. 어렸을때 부터 함께 자라 모든 것을 공유하는 김수영도 친구였고, 사촌인 동시에 연인처럼 구는 채희연과도 더 없이 친밀했다. 그럼 김중규와 정상호는... 여기까지 오는 동안 김중규는 두 번이나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와 함께 있을때면 난 다른 영역을 디디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나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왜 일이 이렇게 흘러들었는지... 흐름이란 항상 두려웠다. 옷을 다 벗고 침대 위에 반듯이 누워있으니 그가 몸을 끌어안고 핥아 왔다. 그가 미처 들어오기도 전에 먼저 사정했다. 그도 나도 술기운에 몸이 열로 들떠 있었다. 여기는 나의 집도 그의 집도 아니었다. 완전히 새로운 장소에서 지배라는 개념 없이 나체로 장난치는 것 같은 섹스가 이어졌다. 물 속에서 가장 즐거운 상태로 수영을 하면서 좀 더 깊이 잠수하고 식은 욕망을 느끼듯 쾌감 가운데 정신은 더 또렷해졌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쾌감을 느끼면서 나는 눈을 떴다. 나를 끌어안고 신음하고 있는 그의 귓바퀴가 보였다. 유괴된 후 그 귀로 들은 말은 뱉지 않았을 한 달의 시간, 안에 고여있었던 침묵이 내게 옮아오기를. "다 잊었지만 한 가지 남은게 있다면 그 날 이후로 단 건 별로야.” “......” “날 고문하고 싶으면 사탕을 사주면 돼. 이런, 아킬레스 건을... 알려줬어.” 식당을 나오면서 그가 중얼거렸다. 그 말을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그가 지니고 있을 일말의 빈틈을, 극복할 수 없는 작은 상처를 알고 싶어서 유괴 이야기가 끝까지 듣고 싶었다. 천장으로 S의 얼굴과 유괴범의 얼굴이 겹쳐 올랐다. 정주한을 구출하고 달래준 이들은 경찰과 그의 부모였겠지만 나는 계속 혼자 일 것이므로 한 달 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가 몸 안에 뜨거운 것을 쏟아냈다. “아...널 보면 기분 안좋다고 했었지?” “......” “지금도 그래. 계속 보고 싶고 만나고 나면 기분이 이상해.” 앞뒤가 안맞는 고백을 받아서 흘려 버렸다. “다 변해. 그런거.” “그런가.” 그의 얼굴에 옅은 실망이 어렸다. 입 밖에 내지만 않는 무수한 말들이 그의 얼굴 위를 걸어다녔다. 우리 어머니가 아버지와 도피했다가 금세 무료해지고 옛날의 부유한 삶을 계속 그리워하듯이, 어머니는 제자리로 돌아가고 만족했다. 정주한도 제 자리로 돌아가서 장유미거나 혹은 다른 여자를 탐해야 훨씬 충만해질 것이 분명했다. “... 사랑.” 나는 발음했다. 뉘앙스를 풍기면 단어를 찾아 따라하는 것은 S가 항상 교육시켜 습득된 버릇이었다. 등을 돌리고 누웠다. 꿈 속에서 정주한이 계속 말을 걸어왔지만 한 번도 대답하지 않았다. 다음 날은 빛이 좋았다. 모텔 주인이 청소하러 왔다가 우리를 깨웠다. 12시가 넘었지만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어 차마 금방 깨우지 못하고 내려갔다가 한참만에 다시 올라왔다고 했다. 그는 추가 요금을 지불하고 나자마자 분리해둔 휴대폰으로 걸려온 전화를 통해 왜 배터리를 분리했는가를 설명하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 내가 원해서 댐을 보러 갔다. 모텔 주인에게 댐 위치를 물어 차를 몰고 갔다. 댐은 생각보다 멀리 있었다. 부러 이것을 보러 여기까지 오는 사람이 있을까 싶게 철망으로 둘러싸여 멀리 있었다. 느긋하게 하품을 하는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댐 아주 가까이까지 걸어갔다. 그가 폰카메라로 댐을 찍곤 잘 나오지 않는다고 투덜댔다. 내가 눈치채지 않을만큼 주의를 기울이며 내 사진을 찍고 있다는 것도 알면서 나는 짐짓 모른척 했다. 경고문을 이리저리 피해 우리는 수문 위까지 올라갔다. 열 개는 족히 넘어보이는 수문 안으로 쉼없이 물이 흘러들고 있었다. 나는 트렁크에서 끌어 내온 쇼핑백을 열었다. 목사의 아내는 기어이 새 책을 챙겨 넣었다. 한 권도 빼놓지 않고 목록별로 차곡 차곡 정리되어 있었다. 나는 새 책을 꺼내 불을 피울 때 사용하는 드럼통 안에 넣었다. 누군가 와서 태워줄 것이다. 사람이 자신의 시체를 치우지 못하는 것처럼, 나는 차마 직접 태울 용기는 없었다. “진짜 안 보여. 더 가까이서 보고 싶어.” 내 청을 정주한은 들어주었다. 댐을 지키는 아저씨에게 부탁을 해서 우리는 접근이 차단된 곳까지 올라갔다. 햇살이 오색으로 빛나면서 물 위에 쭉 곧아 있었다. 위태롭게 서서 그와 나는 무언가 대화를 나누었다. 계속 웃음이 이어졌다. 이런 적은 없었다. “오늘 정말 날씨가 좋네.” “응.” 도시에 도착하면 그가 집에 들어가기 전에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나는 흔쾌히 그러자고 했지만 내 긍정은 대개의 경우 효력이 없었다. 댐을 지키는 아저씨가 그만 내려오라고 호루라기를 불었다. 정주한은 그 소리를 듣고 앞서 내려가기 시작했다. 넌 정말 나한테 큰 선물 준 거야. 언젠가 내게 주겠다던 선물, 내가 원한 것은 거대한 수조. 그러고보니 어제 유괴 얘기를 들려주면 해달라는 걸 해주기로 했는데, 그 약속도 이행하지 않았다. 수조가 눈 앞에 있었다. 암회색으로 빛나는 저 물살 안은 깊고 아늑할 것이다. 내게 다급한 호루라기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멀리 발전소와 오래된 다리, 민가들이 한 눈에 보이는 높이였다. 순식간에 물살에 휩쓸렸다. 나는 도시에 있는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 댐 위까지 네가 먼저 올라가자고 했다면서?" 어머니가 나를 찾아와 처음 꺼낸 말이었다. 상태가 호전되고 나서야 어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 "어렸을때도 안 하던 장난을... 나도 걱정이지만 주한이네 부모님이 많이 놀라셨어. 너도 알지만 그 집은 아들 하나 뿐이잖아." 이마를 덮고 있는 거즈가 답답했다. 거즈 위에 또 거즈 ... 코에서 피라도 나면 비강 깊숙이까지 거즈가 쑤셔넣어졌다. 입원해 일주일이 넘도록 퇴원이 허락되지 않고 있었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받은 처치는 댐이 있는 도시에서 모두 끝이 났다. 큰 병원으로 옮겨져 뇌파 검사에 상담 치료까지 받는 것은 분명 어머니가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 미끄러져서 떨어진건 장난이었지?" 그녀는 몇 번씩 확인 받고 싶어했다. 장난이란 최소한의 재미를 얻기 위해서 하는 행위다. 댐에서 뛰어내린 것에서 어떤 재미도 느끼지 않았다. 내가 느낀 것은 차가운 강물과 내 무게의 체감, 피부를 벗겨낼 듯 매서운 강물 그리고 댐 벽에 부딪혀 의미 심장하게 번져가던 붉은 핏물이었다. 아버지와 함께 가곤 했던 어린 시절 목욕탕의 탕 속에서 항상 머리 위에서 찰박거리던 물은 없었다. 깊이의 아쉬움 없이 끝을 모르고 부딪히고 가라앉았다. 퇴원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병원비를 내는 사람은 새아버지였고 나는 그의 보호 아래 있는 도움이 필요한 어린애에 불과했다. 어머니가 면회를 마치고 가면 의사의 차례였다. 상담을 주관하는 의사는 여자로 단정한 느낌의 사람이었다. 그녀는 잠재되어 있는 부분을 파헤치고 싶어했다. 몇 가지 인지 검사를 마치고 나면 계속 대화의 연속이었다. "혹시 부모님이 모르는 충격적인 경험 같은 일이 있니? 잊을 수 없을만큼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한 거라던지, 그 당시에 해소되고 지나가지 않으면 축적되어서 후에까지 자살 충동의 원인이 되기도 하거든." 그녀가 어제 처방한 약 때문에 몹시 졸렸다. 눈을 감지 않으려고 애쓰는 동안 의사는 안경알 너머로 나를 보고 있었다. 기록에 도움이 될만한 정보를 원하면서 시계를 자주 봤다.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쓸모없는 사람에게 사람들이 하곤 하는 '닥치고 다음 환자'라는 농담이 자꾸만 생각났다. 제대로 대답하지 않으면 오른손에 반듯이 쥐어져 있는 펜촉이 내 동공을 찌를 것 같았다. " 그 날 같이 있던 친구에게서 치료에 필요한 정보를 많이 얻었어." "어떤...정보 말인가요." "네가 갖고 싶는 심리적인 불안이라던가 하는 문제, 뛰어내리기 전에 유괴사건에 대해 집요하게 물었다면서. 친한 친구였니?" "별로 그렇지는 않아요." "친하지 않은 사람과 단 둘이 갈만큼 가까운 거리가 아닌걸로 알고 있는데. 왜 거기까지 갔는지 설명해줄 수 있겠니?" 정주한과 나 사이에 있었던 이야기는 어느 부분을 이야기한들 이로울만한 꺼리는 없었다. 의사 앞에 서면 내 삶 자체가 비정상으로 몰리고 있는 기분이었다. 서둘러 결론을 지어야 했다. " 경치가 더 가까이서 보고 싶었어요. 아래서 보면 잘 안보여서..." "J 댐 주변엔 그럴만한 경관이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나는 어느새 이마를 덮을 만큼 자란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성적 교감이나 상상 없이도 머리카락은 빠른 속도로 자랐다. 한 달 동안 머리카락이 자라 내 이마에 쭉 찢어진 상처를 덮고 있었다. " 거길 가보신적 있나요?" " 아니. 그렇진 않아." " 수문이 열리면 안에 글씨 같은 게 새겨져 있어서 그 글자가 뭐라고 쓰여져 있는지 알고 싶었어요. 그 뿐이에요." "그래, 가까이서 보니 뭐라 써있던가?" "... 글자가 아니었어요. 물이 흐르면서 칠이 벗겨진 흔적이었어요." 수문 아래 물이 쏟아져 내려가는 곳에 글자같은 자국이 새겨져 있었다. 이국에서라면 정말 문자와 비슷할지 모를 일이다. 상담을 마치면 나는 방으로 보내졌다. 간호사가 식사 때마다 가져다주는 약은 세 알로 줄어 있었다. 나는 먹는척하면서 약을 변기통에 버렸다. 상담 놀음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혼자 독방에 앉아 지난 일 년을 되짚어 생각했다. 장유미부터... 정주한에 이르기까지 애초 가만히 있는 나를 건드리지 않았다면 이런 치료를 받는 일은 생겨나지 않았을까. 버리고 삼키고도 남은 약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굴려보았다. 사람을 잠재워 얻으려고 하는 것은 다양했다. . .. S는 내 몸을 그리고 의사는 내 무의식과 본심을 원했다. "작년에 같은 반 학생이 학교에서 자살 시도를 했고, 지인의 장례식에 다녀온 일이 가치관에 영향을 줬다고 생각하니?" 댐 안의 물이 차가워 숨이 끊어지지 않았다. 뜰채로 물고기를 끌어올리듯 물 위로 올려 졌을때 한기가 쏟아졌다. 나를 건져올린 사람들이 그림자로 눈 앞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 어느 정도는요." " 십 대 후반이나 이십대 초 특히 스무살 때는 의미없는 일들도 자신에게만 크고 아프게 다가오기도 하지. 나도 그랬었고. 자살이나 죽음 같은 것을 동경하기도 하고, 극복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절망에 시달리기 쉬워. 모두 어려운 문제가 아니야." " 네." 대답을 하면서 나는 점점 말라갔다. 나는 말라갔다. 목을 늘어트리는 식물처럼 창을 등지고 침대 위에 앉아서 시간을 소비했다. 어머니는 일주일에 두 번 화요일과 목요일에만 왔다. 반입할 수 있는 물건은 수가 적었다. 끝내 붙은 대학들 중의 어느 곳도 고르지 못했을 테지만 어머니가 일방적으로 도시에 있는 명문대에 등록시켰다고 통보했을 때는 가슴이 먹먹했다. 어머니 외에 두 번째 방문자가 있었다. 나를 만나러 김수영이 찾아온 것이다. 그의 옷차림을 보고 겨울이 다 끝났음을 알았다. 겨울은 끝이 났다. "흰 옷 잘 어울리네." 그는 병실복을 가리켰다. 면회실 내부에 있는 세면대에 손을 씼었다. 물이 아무렇게나 튀었다. 팔부분이 젖어 나는 팔꿈치까지 옷을 걷어올리고 다시 테이블 앞에 앉았다. 마음만 먹으면 손을 잡을 수도 있고 바라보고 웃을 수도 있을만큼의 자유는 보장되었다. 이 공간을 어색하게 유지하는 것은 병원의 시스템이 아니라 방문자와 환자들이었다. 그는 말없이 나를 보았다. 침묵이 아니라 긴 응시였다. "나가고 싶지 않아?" 내 의사를 타진하는 질문, 그렇다, 아니다 라고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을 원해 왔다. 하지만 김수영의 입을 통해서 나오기를 바란것은 아니었다. 그는 긴 손가락을 테이블 위에서 천천히 움직였다. 미약한 금단증상이라는 것을 여기 갇혀 다큐멘터리로 보지 않았다면 몰랐을 것이다. "담배 피워도 돼?" "몰라. 피워본 적 없어." 그는 담배를 꺼내 피웠다. 그의 얼굴은 분명한 환기 효과가 있었다. " 26일날 A 대학 신입생 OT가 있어." "........" " 여기 마음에 들어?" " 아니." " 그럼 왜 이렇게 오래 죽치고 있는거야." "......." " 부모가 널 버렸나?" 창고, 정주한의 집, 마스터베이션 그들만의 세계에 얽혀들게 된 포문은 김수영이 시킨 몇몇 행위에서 비롯되었다. 어머니 외에 찾아온 첫 방문자가 김수영이라니, 의사는 분명 친구에 그를 기록할 것이다. " 담임이 부탁해서 형빈이를 계속 후원하고 있었어. 아직도 살아있거든. 뭐 지금은 담임도 아니지만." "........" " 동정의 차원에서 들른 건 아니니까 그렇게 노려볼 거 없어." " 넘치게 갖고 있으면서 얼마 떼 준다고 그걸로 거들먹거릴 거 없어." “갖고 있으면서 주지 않는 것보단 낫잖아. 안그래? 그 자식은 뇌가 으깨졌는데도 아직도 살아있으니, 인체의 신비야.” “제발. 그렇게 말하지마.” 내 목소리가 흔들렸다. 형빈을 찾아가지 못한지도 많은 시간이 흘렀다. 마음이 약해지는 건가. 잔혹하게 말하는 김수영의 목소리를 들으니 서러웠다. "널 도와줄 수도 있어. 의사를 만나서 얘기를 좀 하는 거지. 우린 즐거운 대학생활을 앞두고 있다, 고등학교도 같고 대학교도 사는 동네도 같고 어느 정도는 믿어주겠지. 뭐 반대로 얘기할 수도 있지. 발기부전..." "........" " 요즘은 잘 되냐? 주한이네 집에서는 안됐잖아. 하하." 나는 테이블 위에 놓인 책을 그를 향해 집어던졌다. 책은 빗겨서 바닥에 떨어졌다. 그는 두 번째로 피우던 담배를 느긋하게 눌러껐다. "... 가기 전에 의사를 만나고 갈 거야. 소감을 묻겠지. 너를 본 소감을."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로 밀리는 의자소리, 담배를 내려놓은 그의 손은 허공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너를 본 내 감상은 처음하고 같아. 전학 온 날에 느낀 거나 지금이나. 그러니까 여기서 나와." 나가게 해달라고 간절하게 매달렸어야 옳았을까. 고교시절 나를 괴롭히면서 얻지 못한 것이 있었다면 완전한 굴복이었으니까. 제발 나가게 해주세요, 그가 요구했으면 따라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문을 열고 나가 사라졌다. 그 밤은 후회로 뒤덮였다. 김수영이 언질을 주고 간 OT 날짜와 얼마 멀지 않게 나는 퇴원할 수 있었다. 들어갈때와 나올때의 계절의 변화가 심해 적응이 쉽지 않았다. 집에 왔을때 새아버지가 대학 근처에 오피스텔을 얻어두었다고 통보했다. 오피스텔도 이 집도 학교도 멀리 있지 않았지만 내집을 얻는 것에 토를 다는 사람은 없었다. 내 몫으로 물건이 가는 것을 끔찍이 싫어하는 두 여동생들도 조용했다. 식사 시간은 입원 전보다는 좀 더 부드러웠다고 해야할까. 곧 내가 떠날 사람이라는 사실 때문인지 그의 태도는 고등학교 때보다는 누그러져 있었다. 나는 새아버지 집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을 손님방에서 맞이했다. 내 방의 짐들은 모두 빼내 이미 오피스텔로 옮겨졌고, 방문은 못질이 되어 막혀 있었다. 처음과 같았다. 어머니를 따라 이 집으로 들어왔을때도 그 공간은 못질이 되어 있었다. 아무도 살지 않았던 공간에 내가 들어가 살았지만 흔적은 거의 남지 않았다. 손님방 침대에서는 여전히 신나 냄새가 나고 있었다. 정주한이 예민하게 지적했던 그 신나 냄새, 나는 침대에 엎드려 냄새를 한껏 흡입했다. 환각효과를 기대해봤지만 아무 반응도 없었다. 일주일에 두 번씩 들르기로 하고 그 집을 떠났다. 집을 나올때는 날씨가 많이 따뜻해져 있었다. 어머니가 병원에 일수를 찍듯 찾아와 일정하게 만남시간을 채우던 것이 이번에는 내 차례로 옮아온 것이다. 커튼과 식료품이 전혀 없다는 점을 빼면 오피스텔은 완벽했다. 홀로 살기에 적합한 물건들이 갖춰져 있었다. 나는 책장에 순서가 어긋나 마구 꽂혀 있는 책들 중에서 형빈의 교과서를 발견했다. 고교시절의 아픈 기억으로 가장 큰 증거였다. 나는 책꽂이에서 그것을 빼내 무릎 위에 놓고 가능한한 조심스럽게 손때가 묻은 책장을 넘겼다. 손이 얼어 붙은 듯 조심스러웠다. 책을 여는 일은 마치 퍼즐 같았다. 하나를 열면 하나가 문을 닫고 있고 그 문을 열면 누군가가 낸 목소리가 있었다. 이건 교과서에 불과하지만 반장의 목소리가 있지는 않을까. 본 내용으로 넘어가기 전 맨 앞에 끼워져 있는 푸른 속지, 그 밑에 반장이 고심해서 쓴 듯한 글씨가 있었다. ‘나는 행복하다.’ 그 말은 나를 멍하게 만들었다. 혼자 살게 되니 어이 없는 경우에서 비어 있는 물품이 발견 되었다. 쓰레기를 담으려고 보면 쓰레기봉투가 없고 다친 손가락을 치료하다보면 밴드가 없는 식이었다. 백화점을 선택해 식품 코너에서 먼저 장을 봤다. 뭘 사야 좋을지 몰라 주로 포장된 것들로만 집었다. 요리는 어느정도 할 수 있지만 잘하지는 못했다. 혼자 많이 먹을리는 없지만 요리책을 한 권 사두려고 팔 층으로 올라갔다. 물건 사는 순서를 거꾸로 할 걸 그랬나 양손에 들린 잡다한 물건이 무거웠다. 물건을 내려놓고 책을 집어서 뒤적뒤적 하고 있는데 익숙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언제나 주변에서 가장 도드라지는 경쾌한 웃음 소리, 저 웃음에 끌려서 분위기를 잊고 키스를 나눴었다. 나는 얼굴을 들기 전에 이미 입으로 희연의 이름을 작게 중얼거렸다. 예상대로 그녀가 맞았다. 그리고 그녀의 등 뒤에 몇 개월만에 보는 정주한이 있었다. 희연이 다가와 말을 거는 동안에도 그는 내쪽을 보지 않았다. “뭐야~ 너 그동안 안보이더니 동거라도 하는거야. 이게 다 뭐야.” “나 학교 앞으로 집 옮겼어. 이제 나와서 살아” “독립이야?” “너희는... ” “아 우리 둘 다 얼마 있으면 떠나. 그래서 몇 가지 사러왔어.” 날짜를 세지 않았다. 하지만 적지 않은 날들이 지나간 것은 분명했다. “나 먼저 간다.” 그가 희연을 향해 일방적으로 말하고 몸을 돌려 가려고 했다. “주한아 무거워서 나 혼자 다 못 들어.” 희연의 손에 들린 짐을 받아들려면 이 쪽으로 좀 더 와야했다. 그는 나를 외면했다. “기사 불러줄게.” 그녀는 금세 울상이었다. 너희 싸웠어? 하는 듯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싸우다니, 그렇지 않았다. 일방적으로 내가 그를 밀어냈을 뿐이었다. 그는 댐 위까지 날 올라가게 도와주었다. 그를 두고 물살에 휩쓸렸다. 혼자 물 속에 휩쓸리는 시간은 지나온 모든 시간보다 훨씬 고독했다. 댐에 머리를 부딪혀 모세혈관이 터져나온 순간 정주한은 뭘 하고 있었을까. 아마 그의 가슴에 여러가지 감정이 빠르게 새겨졌겠지. 고독과 불안 원망과 후회. 우리 사이가 어그러져있다는 것이 속상한지 그녀는 정말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방금 전까지 즐겁게 쇼핑하고 있었다. 내가 모습을 나타내지만 않았다면 계속 쭉 이어졌을텐데... 미안했다. “내가 들어다 줄게.” 쇼핑백을 잡으려 하는 순간 그가 와서 확 가로챘다. 바람이 일 정도로 신경질적이었다. “내 물건에 손대지마.” “.......” “그리고 이런식으로 눈 앞에서 얼쩡대지마. 나 아직 화 안 풀렸어.” 나는 병원에 있는 내내 그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자꾸 질문들이 차올랐다. 꼭 그에게 향하는 것이 아니라도 영영 다시 사람들을 마주보고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오지 않을 것 같았다. 내 옷은 D시를 떠나오던 날 입은 그대로였다. 여벌의 옷도 사야했다. 이들과 헤어지면 사층으로 내려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예정되어 있는 순서대로 그는 떠나고 나는 여기 혼자 남아 있을 것이다. “거기가 어디라고 뛰어 내려! 니가 죽으면 난 자살방조였어!! 분명 정상이 아니니까 치료가 필요하다고 너희 엄마한테 말했어. 오랫동안 널 볼 수가 없었지만 지금도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해.” “그래... 네 덕분에 오래 있었어. 하지만 나한테는 필요 없는 치료였어.” 적당하게 온도가 조절되어 있을텐데 이상하게 더웠다. 식은땀이 나서 나는 모자를 벗었다. 맞은편에 있는 화장품 샘플 테스트용 거울에 머리카락이 짧게 잘려진 얼굴이 보였다. 머리카락 밑으로 이마에 새겨진 상처가 선명하게 비쳐 보였다. 흉이 이제야 완전히 가라 앉느라 색이 한껏 붉어져 있었다. 내 몸에 새로운 틈이 생기자 붉은 피가 쏟아져 나왔다. 물 밖으로 끌어 올려져서도 피가 멈추지 않아서 지혈 하느라 친구가 머리뼈가 으스러지도록 이마를 짓눌렀다고 의사는 말했다. 낙인이 찍힌 내 이마에서 정주한과 채희연이 눈을 떼지 못했다. 댐에 오르기 전날 밤부터 그의 얼굴을 걸어다니던 감정들이 아직도 정리되지 않았다. 한 달은 꽤 긴 시간이었는데... 그는 미친놈과 어울린 몇 개월을 도려내지 못했다. 여기서 조금만 더 대화를 나누면 그가 울어버리던지 내가 울어버리던지 둘 중 하나의 결론으로 귀결되지 않을까. 그는 의외로 심약한... 구석이 있으니까. 팔 층에 올라온 목적은 요리책 구매였다. 곁에 있는 요리책 중에 아무거나 집었다. 벽돌처럼 무겁고 두꺼웠다. 이거라도 있으면 혼자 오피스텔로 돌아가는 동안 허전하지 않을 것이다. “이쁜 이마... 상처 많이 났어.” 희연이 작게 중얼거렸다. “... 아물고 있는 중이야.” 나는 대답했다. * 신입생 OT를 가지 않았기 때문에 학기가 시작하고 나서 벌써 친밀하게 어울리고 있는 사람들 사이를 유령처럼 오갔다. 친분을 맺는 것에 혈안이 되어 어울리고 있는 사람들, 고등학교 때는 배척하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불과 몇 개월 만에 입학생들은 사교적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같은 학부 학생이기 때문에 시야에 필연적으로 김수영이 들어왔다. 그는 칼날을 숨기고 어느 정도 선량한 학생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는 그런 것도 아주 잘 어울렸다. 수업을 혼자 들으러 다니면서도 처음 전학 왔을 때와 비슷한 일들이 몇 번 있었다. 조금만 바람을 일으켜도 먼지가 확 일어나듯 동기 여자 몇 명이 나에게 관심을 보였다. 학기 초에 무성한, 신입생에게는 의례 있는 일이라고 말하면서 그들의 접근 강도는 조금씩 세졌다. 나는 트러블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 여자친구가 있다고, 그것도 지방에 있다고 본의 아닌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일 학년에 공통 교양 과목은 정해져 있기 때문에 김수영과는 강의시간마다 거의 마주쳤다. 그는 사람들 속에 있었지만 동시에 있지 않았다. 우연히 학교 입구에서 그가 나눠주는 전단을 받았을 때 나는 조금 어이없게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앞에서는 아닌 척 했지만 아주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나를 비롯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전단은 노동자의 인권탄압에 대한 보도 전문이었다. 확성기를 갖다 놓고 등록금 인상에 대한 시위를 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휩쓸린 김수영. 일 학년들은 강제 동원이었다. 새아버지 집의 전화번호를 기록해놓아서 나에게 연락이 닿지 않아 몰랐던 것이다. 등록금이 얼마인지 나는 알지 못했다. 다음 학기부터는 철저히 알아야 할 테지만. 어머니의 원조가 언제 끊길지 알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몇 백 만원이 오른다고 해도 계절마다 휴양지로 떠나는 김수영이 그 불편과 불안을 끝내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김수영은 조금도 안타까워하지 않을 것 또한 분명했다. 교문 앞에 서서 저런 종이를 돌리는 사람들이 모두 완전한 피해자이며 무결할 수는 없겠지만 노동과는 일말의 연관성이 없는 김수영이 저런 종이라니... 햇빛 아래 그가 나눠주는 종이만큼이나 창백한 그의 얼굴빛이 날카롭게 그들을 겨누고 있었다. 그는 탄압을 당하는 입장이 아니라 오히려 탄압에 가까운 인물이 분명했다. 알아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까. 점점 그는 어울리던 무리에서 떨어져 나왔고 며칠 후 강의실에서 마주했을때는 휴대폰이 바뀌어 있었다. 나는 TV를 들여놓았다. 별다른 재미를 느끼지 못했지만 그냥 사놓고 싶었다. 가장 필요한 건 노트북이었지만 살 돈이 없었다. 레포트를 할 때마다 학교 전산실에 남아 늦게까지 작업을 해야 하는 일이 내 생활에 최대한의 불편함이었다. 어머니는 오피스텔을 청소해주는 가정부를 가끔 보내주었다. 그녀는 청소기를 콘센트에 연결했다. 내가 이불을 정리하려고 하면 그냥 두라고 한사코 제지했다. 가정부의 손놀림에 비하면 내 몸짓은 시늉에 지나지 않았다. 오피스텔을 원래의 깨끗함 대로 유지하는 솜씨였다.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고 거울의 작은 얼룩까지 바로잡는 동안 나는 하릴없이 앉아 있었다. 가정부도 가고 난 밤엔 밤에는 가끔 산책하러 나갔다. 평화로운 고요였고 지독한 고요였다. 불과 2개월 만에 김수영과 나는 강의실 두 개의 섬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무리와 붙어있지 못한 인간들 대부분이 안절부절 못하는 것과 달리 그와 나의 공통점은 아주 여유롭다는 것이었다. 도서관에서도 잔디에서도 강의실에서조차 나는 홀로 있는 시간이 좋았다. 이 공통점 때문에 우리는 같은 부류로 취급되기 시작했다. 안 좋은 소문도 떠돌았다. 듣지 않으려 해도 강의 시작 전 창 밖을 보고 있으면 들렸다. 그와 나의 부유함, 싸늘한 태도에 대한 모욕들이었다. 나의 부유함에 대한 정보는 완전히 잘못되었지만 바로잡기엔 이미 걷잡을 수 없이 늦었다. 그와 나의 강의실 책상은 아주 멀었다가 차츰 좁혀졌다. 가깝게 앉을 수밖에 없는 기류가 형성되고 있었다. 병원에서 마주한 지 몇 개월 만에 그와 나는 말문을 텄다. 우리는 운동장에서 한창 진행중인 등록금 투쟁을 멀거니 보고 있었다. “나에게 메이데이에 참석하라던가, 전단을 돌리라던가, 노동자 인권탄압에 대해 논해보자고 하는 거 정말 우습지 않아? 몇 번 토론에서 말 좀 했을 뿐인데...” “뭐라고 했는데...?” “사람들이 현혹되기 쉬운 말.” “.......” “나 입은 옷 안 보여? 저 운동장에 모인 사람들 입은걸 다 합쳐야 가격 비슷할걸.” “... 그 정도는 아냐.” “네가 어떻게 알아.” “둘 다 경험해 봤으니까.” “경험. 그래. 난 그 단어를 좋아하지. 대학생활도 초반부엔 좀 흥미로웠어. 종반 부엔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지만.” “여길 사 년 다녀야 돼. 종반이 아니야." 상처주기 위해 말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의 발언에 상처받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너도 저기 나가서 함께 피켓 들어야 하는 거 아냐?” “관심없어.” 유유자적하게 커피를 마시고 있는 그를 향해 복도 끝에서 선배가 다가왔다. 너희 일 학년이지? 라는 질문으로 시작한 선배의 질책이 이어졌다. 이런 반응은 낯설었다. 대학은 최소한의 자유가 보장되는 곳이라 믿었지만 고등학교 때 선생들이 하던 조율과 폭압을 선배들이 가하고 있었다. 학내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학기 초에 환대는 이런 운동에 동원하기 위해 섭니까?” 그는 적당히 선배를 따돌리고 싶어했지만 열이 오른 선배에겐 통하지 않았다. 결국 김수영은 그를 노려보면서 짧게 한마디를 뱉었다. 선배가 가고 나자 그는 채 마시지 않은 커피를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커피가 벽까지 핏물처럼 튀었다. “귀찮아.” “친하게 지내려고 했던 건 너잖아.” “그래 너는 도도하게 가만있었지.” “......” “사람을 사귀려고 필사적으로 노력 해본 적 없어. 어렸을 때부터 주한이랑 쭉 같이 있었고, 필요에 의해서 사람들이 다가왔지. 하지만 이런 필요는 아니었어. 사교술 좀 써봤는데 잘못 사용한 거 같군.” 사실 대학 내는 부유층 자녀들끼리만 어울리는 서클이 있었다. 새아버지는 내가 이 대학에 붙은 사실에 어느 한 편으로는 놀라면서 스키나 골프 클럽의 이름을 빙자해서 그 안에 소속되어 자신들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집을 떠나기 전 언질을 주었다. 김수영은 이미 그 안에 가입되어 있으면서 그의 말 그대로 사교술의 차원에서 사람들을 몇 번 떠봤을까. 신입생 OT, 초반의 그 다정함은 전부 실험... 대학을 다니다가 유학길로 갔다는 그의 형들도 결국 이런 식으로 사람을 대하고 결론을 맺고 가버렸을까. 나는 김수영에게 애착이라는 감정이 존재하지 않는 느낌을 받았다. 잔디밭에 앉아있을 때면 더 많은 전단이 날아왔다. 나무에 핀 꽃보다도 학교 관계자들이 찢어 날리는 종이쪽지가 교정을 뒤덮었다. 나는 이런 소요 사태를 이해할 수도 휩쓸릴 수도 없었다. 무언가 들뜬 것처럼 선배들의 뒤를 따라다니는 동기들의 행동도 그들의 비난 섞인 시선도 이상할 뿐이었다. 강의실은 점점 텅 비어갔다. 집기들이 몇 십개씩 묶여 강의실 뒤에 처박혀 있곤 했다. 내가 맞은 첫 대학생활이었다. 나는 휴강이 되면 형빈에게 찾아갔다. 그는 모든 파괴와 소란 뒤에서 가만히 누워 있었다. 움직이고 소리 지르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너라면 어떻게 했을까. 반장. 그들 무리 속에 기꺼이 섞였을까... 분명 넌 약자의 편에 섰을 거야. 하지만 나는 내가 약자인지 알 수가 없다. 서양철학 공통 교양 강의를 들으려고 준비하고 있을 때 학내 데모가 격해지면서 그 어떤 회의에도 참석하지 않은 나는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해결되지 못하고 쌓이고 있는 안건에 대한 불만을 내게 쏟아내는 것 같았다. 시멘트 벽 내부는 봄이지만 으슬으슬했다. 나를 둘러싼 선배들의 모습은 더욱 싸늘했다. 나에게는 발언의 기회도 없었다. 고작 일 학년 학생 두 명이 빠지는 일에도 선배들과 동기들은 무척 예민하게 반응했다. 내가 속해있지만 나의 세계가 아닌 것처럼. “죄송하지만 전 그런 일에 관심없어요.” 한참만에 내가 어렵게 꺼낸 한마디는 불을 지른 결과가 되고 말았다. 분위기가 험악해지려는 찰나 수업 시간 정각에 맞춰 김수영이 홀연히 들어와 가까이 앉았다. 선배들이 그와 나를 번갈아 노려보았다. 그와 내가 한 끈으로 묶여있었다. “강의 시작 합니다. 수업 아니면 나가주세요.” 목소리가 울렸다. 나는 그들의 대립 앞에서 곤란한 기운을 넘어 수치를 느꼈다. D시에서 느낀 성적 수치와는 달랐다. 태연한 김수영과 투쟁이라는 완장을 달고 있는 맹목적인 그들의 땀 섞인 얼굴. 어느 쪽도 아닌 아직 정체성도 없이 앉아있는 스스로가 구역질이 났다. “너 뭐라고 했어? 이 새끼야.” 여자들이 남자를 말렸다. 우린 이러기 위해서 여기 온 게 아니야. 생각 없는 애들은 그냥 포기하자. 시간이 없어. “너 스키 서클이지?” 남자선배가 울분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스키서클, 골프서클... 그것 만으로도 그의 위치가 설명되는 것일까. “스키 서클 들고 싶으면 서클 실로 오세요.” “뭐?” “생각도 없고 돈도 없고 예절도 모르는 선배님들. 취직할 때 돼서 울지 말고 후배 학점 관리 좀 하게 나가주시죠.” 그는 안면에 비웃음을 띠고 있었다. 남자의 욕설에 손으로 귀찮다는 듯이 손사래를 치더니 더 이상은 대꾸하지조차 않고 책을 폈다. 이성과 힘, 서양철학의 이해. 그 어떤 것도 이해할 마음이 없는 그는 자리를 지키고 선배들은 책상을 걷어차며 강의실을 나갔다. 교수가 들어왔다. 대형 강의실에 그와 나 그리고 교수 세 사람뿐이었다. 교수는 딱딱히 굳은 얼굴로 우리에게 여태까지 배운 서양철학 레포트를 써오면 A+을 보장해 주겠다고 했다. “가자.” “.......” “가자니까. 레포트 쓰러.” “사람들한테 그러지마.” “뭘?”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 학내 분규에서 어떤 식으로 대처했을까. 레포트. 앞서가는 김수영의 뒤를 따라갔다. 이 안에 있을 수는 없었다. 외부의 문제 속에서 내면은 더 형편없이 비틀어지고 있었다. 학생들 사이에서 그는 스키서클 부원들과 짧게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한 쪽에 비켜 서있었다. 그때 시위하고 있던 학생들 쪽에서 돌이 날아왔다. 나는 그들이 들고 있는 피켓을 보았다. 등록금 투쟁/학생회 처벌 당장 철회하라 강렬한 햇빛 속에서 얼굴이 타는 줄도 모르고 그들은 열심히 시위 중이었다. 새아버지가 A대학 출신이라는 것을 입학하고야 알았다. 그는 좀 더 태도를 부드럽게 바꿔 대학교 입학금 이후의 학비와 오피스텔 관리금도 지급하겠다고 했다. 내가 동문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작은 돌이 발치에 그리고 종아리 부근에 툭툭 떨어와 맞았다. 고교시절 정주한과 함께하던 것처럼 김수영은 스키부 부원들과 눈살을 찌푸리며 학생들을 보고 있었다. “졸업할 때 취직자리 알아봐 달라고 사정할 것들이... ” 혀를 차면서 그는 곧 달려들 것처럼 이쪽을 노려보는 사람들의 시선, 그러나 정면으로 대항하지 못했다. 가시 돋힌 그 말이 어느 정도는 사실이라는 것을 우리는 전부 알고 있었다. “집에 정리해놓은 자료가 있어. 집에 가서 하면 금방 끝나.” 둘 다 여러 면에서 평범한 대학생활을 원하는 학생들로부터 분리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었다. 공교롭게도 적은 인원 중에서 그와 내가 유일했다. 강의를 들으면 짧은 찰나가 행복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었다. 좋은 미술품을 보았을 때의 그런 느낌, 여러 가지 뜻을 내포하고 있는 짧은 음절의 단어를 들을 때마다 이런 감각 때문에 대학에 올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잡아두려 해도 순간은 짧았다. 그렇기에 순간인가. 이렇게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실제로 교문을 벗어나 돌담을 된 정문을 벗어나면서 내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내가 왜 우는지 나도 몰랐다. “왜 울어?” 그는 담배를 피우면서 내가 울음을 그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향이 아주 좋은 담배였다. 그는 한 대를 더 꺼내 스스로 불을 붙여서 건네주었다. “맡아봐.” 타들어가는 향을 맡으면서 피우지 않고 그냥 들고 있었다. 향이 달았다. 그의 집은 새아버지의 집과 가까웠지만 좀 더 외진 곳에 있었고 더 넓었다. 레포트에 관련된 디스켓과 책만 받고 갈 생각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집과 집이 복층으로 연결되어 실제로는 두 개의 건물이 정밀하게 이어져 있었다. 이 구조를 익히는데에는 정주한의 집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해보였다. 장식장들에는 술병과 조각품들 그리고 흰 벽 정확한 중앙에 그림들이 몇 개 걸려있었다. “워낙 수집하는 걸 좋아해. 두 분 다.” 그의 방은 창이 아주 컸다. 전면이 완전히 유리로 롤스크린을 올리자 뒤채가 다 내려다보였다. 푸릇푸릇한 식물들이 알맞게 배치되어 있었다. 꽃이 피는 차례와 색이 절묘했다. 조경 전문가가 해놓았을까... 아름다운 것을 보면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렸다. 이런 풍경을 어렸을 때부터 당연하게 보고 자란 김수영의 얼굴이 환기 효과를 띠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마호가니 책상과 서적들, 책과는 연관성이 없는 정주한과는 또 다르게 그의 반의 두 면이 온통 책이었다. 아마 여기 말고도 다른 곳에 또 서재는 따로 있겠지. 이 방에 있는 책들은 올곧이 그의 취향이라는 의미가 된다. 그들은 사람을 대할 때 선을 그으면서 이상하게 집에 초대하는 것에 스스럼이 없었다. 그가 디스켓을 가지러 가고 나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나무 장식 선반에 올려진 액자들이 보였다. 사진이 쭉 있었다. 아주 아기였을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모두 있었다. 나는 정주한과 그가 함께 찍은 사진 중에 유치원복을 입기 전의 정주한을 빠르게 훑어 찾았지만 없었다. 그가 돌아와서 디스켓을 툭 던져주곤 책장에서 책 몇 권을 뽑아 주었다. “나 책 구기는 거 싫어하니까 조심해서 봐. 레포트는 학기초부터 정리해둔 거라 별로 따로 덧불일 건 없을 거다.” “.... 주한이랑은 언제부터 친해졌어?” 방에 들어와 사진까지 봤다. 한 마디라도 예의상 묻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질문했다. “그냥 어렸을때부터 자연스럽게...” “........” “그 자식도 나도 성격이 별나서 사실 우정이 유지되는 건 좀 신기하지만.” “주한인 나한테도 친구라고 했어.” “그래?" 나는 학교를 벗어날 때 왜 울었을까. 혼자 있을 때도 울지 않았다. 사람들이 나를 비난했을 때도, 이어지는 폭력에도... 아까는 마음의 아주 깊은 곳을 꿰뚫리는 느낌에 눈물이 났다. 나는 그 시위의 현장을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갔지만 학생들은 아직도 고되게 그 일을 계속하고 있을 것이다.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처럼. “따라와.” 그는 미로 같은 복층 구조의 집을 성큼성큼 내려갔다.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일하는 사람조차 모습을 보이지 않는 집에서 나는 그의 뒤를 쫓아갔다. 냄새도 기척도 없는, 그는 빙빙 돌아 아까 내가 바라보던 정원 아래까지 나를 데려갔다. 위에서 내려다 보았을때보다 훨씬 보기 좋은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나무의 껍질들, 잎사귀들, 공기가 청명했다. 어깨로 내려앉는 꽃잎을 털어가면서 그는 외진 장소로 날 몰아갔다. 들어올 때 마당에 개집이 있었는데 안은 텅 비어있었다. 김수영이 몸을 낮추고 개 짖는 소리가 나는 우리 안을 보았다. 나 역시 따라했다. 품종 있는 한 마리 개가 안 쪽에 웅크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품에 서너 마리는 족히 되어 보이는 새끼들이 오물대며 모여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탄성을 지를 만큼 귀여웠지만 김수영은 병원에 있던 나를 보던 때의 그 길고 긴 응시를 할 뿐이었다. “원래 종자가 있는 개였는데, 잠시 풀어놓은 사이에 나가서 새끼를 가져버렸어. 아버지가 죽여버린다는 걸 엄마가 못하게 해서 여기 놓긴 했는데, 어미 개는 예전부터 키운거라 몰라도 새끼들은 일주일내로 처분당할 거다.” “.... 불쌍해.” 처분이라니, 나는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분쇄기가 떠올랐다. 어미개가 김수영을 알아보는지 몇 번 크게 짖었다. 반가움의 표시였다. “이 얘기를 주한이한테 했더니 그 자식이 뭐라고 했는지 알아?” “.......” “한참 동안 말이 없어서 전화가 끊어진 줄 알았더니...” “......” “은혁이는 나보다 개를 더 좋아해. 내가 말하고 있는데도 개새끼만 끌어안고 있었어. ” “.......” “너 개 좋아한다며. 널 주래. 한 마리.” “......” 그가 몸을 더 낮춰 우리 안으로 몸을 더 집어넣었다. 성견은 나를 경계했지만 주인 아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우리 안에서 뭐라 말할 수 없는 냄새가 났다. 그는 안에 담긴 강아지 한 마리를 꺼냈다. 잔디 위에 비틀비틀 대는 강아지. 그의 긴 손가락이 기어다니는 것도 힘겨운 동물의 배를 쓸었다. “아까 시위하는 애들 볼 때도 네 눈빛은 그랬어.” “.......” “눈물이 난다는 건 넌 아니라는 거겠지. 넌 영원히 시위하지 않을 거니까. 나도 그 점은 마찬가지지만 불쌍하다는 말 그렇게 쉽게 하는 거 아냐.” “......” “가져가. 울지 말고.” 집에 와보니 어머니가 다녀간 흔적이 있었다. 그에게서 받아온 강아지가 손바닥을 핥았다. 다툼은 언제가 끝을 맺기 마련이다. 투쟁도 대상의 침묵 앞에서는 맥을 잃고 곧 그쳤다. 겉으로는 평화로운 학교로 돌아왔다. 처음 입학할 때처럼 사교의 장으로, 누가 제일 화려한 옷을 입고 왔는가를 겨루는 듯한. 나는 잔디나 도서관 선반에서 드물게 학교를 뒤덮었던 그 투쟁의 종이 조각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한때는 절절하게 쓰였을 붉은 글자들은 모두 잘게 찢어져 선이나 곡선으로 흩어져 있었다. 전공이 확실히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종강 이후의 술자리는 흔치 않았다. 혹은 나와 그를 제외한 어딘가에서만 모임이 진행되고 있을지도 몰랐다. 나는 서양철학 종강 회에만 참석했다. 별다른 것 없이 간단하게 맥주를 한 잔씩 마시고 교수도 수강생들도 서로 얼굴을 살피지 않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한 학기가 흘러갔다. 이제 두 달 넘게 학교에 나오지 않아도 됐다. 집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좋았다. 그 흐름을 끝을 체감하며 김수영과 나는 후문에 서있었다. 그는 술자리에서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듣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조용한 곳에 갈까?” 그는 어둠을 내려다보며 말을 걸었다. 꼭 내가 아니어도 곁에 있는 사람 누구에게든 흘려 말하는 것 같은 제안이었다. 시간이 매우 무의미하게 흘러간 것, 그리고 대학에서의 첫 학기가 끝났다는 사실은 사람을 나른하고 충동적으로 만들었다. 김수영도 나와 그다지 다르지 않은 감정이었을까. 나를 그를 따라갔다. 그가 앞장서간 클럽에는 심장이 쿵쿵 울릴 만큼 비트가 강한 음악이 있었다. 천장과 바닥에서 솟구치고 떨어지는 조명에 사람들의 얼굴이 왜곡되고 있었다. 거리낌 없이 키스하는 사람들은 성별의 구분이 없었다. 말로만 듣던 게이클럽일까. 나는 이런 곳으로 날 데려온 김수영이 별다른 저의를 보이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했다. 앉을 수 있는 곳이 분리되어 있긴 했지만 칸막이가 유리라 모든 혼란한 빛이 몸으로 그대로 쏟아졌다. “여기 자주 와?” “아니. 처음이야.” 그는 내가 보던 날 중 최고 무력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의 말 그대로 조용한 곳은 분명 아니었지만 섞여서 춤을 추고 몸을 밀착시키는 남자들을 바라보는 그의 눈은 고요했다. “뭐 안 좋은 일 있어?” “아니.” 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다만 입모양으로 뜻을 읽었다. “오늘 너 우울해 보여.” “아냐. 기분 좋아. 형이 미국에서 다니러 왔거든. 아주 기분 좋아.” 그가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는 일은 드물었다. 특히 정주한이 없으면 자기 신상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았다. 아주 기분 좋아. 그는 늪에 가라앉는 것처럼 몸을 의자에 밀착시키고 정면을 보고 있었다. 무슨 다큐멘터리라도 제작할 것처럼 그의 눈은 사람들을 훑는데 여념이 없었다. 얼굴이라던가 몸에 대한 시선이 아니라 행태를 읽는 것 같았다. 서로 더듬는 손이라던가, 혀가 얽혀드는 것이 다 보이는 입 같은 것을. 그가 게이는 아닐까 생각한 적이 있었다. 장유미를 쫓아다닌 정주한이 확실히 스트레이트 쪽이라면 그는 모호했다. 도서관에서 처음 나를 희롱하던 손길은 단순히 예민한 간파였을까 아니면 그의 성향과도 연결되어 있었을까. 데려온 강아지는 날이 갈수록 커갔다. 어미와 떨어져서 삼일을 울더니 울음도 잦아들었다. 다른 새끼들은 어떻게 처분했는지 묻고 싶었지만 장소도 적절치 않고 김수영과 나의 사이가 사사로워 지는 것 같아 더 이상 질문할 수 없었다. 지금쯤이면 강아지는 내가 나간 후 먹이통에 있는 먹이를 전부 먹고 잠들어 있을 것이다. 누가 깨우지 않으면 결코 눈을 뜨지 않을 것 같은 고르고 순한 잠이었다. 유령의 집처럼 일하는 사람들마저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 집이지만 그의 형이 돌아왔으니 떠들썩할까. 입으로는 좋다고 하면서도 그의 표정의 모순은 깊었다. 화장실에 가서 손을 씻는데. 씻고 오는 동안 두 명의 남자가 몸을 밀착해 왔다. 통로를 지나갈 때조차 슬쩍 허리에 손을 얹어왔다. 그들을 무시하고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왔을때 아까부터 우리 쪽을 주시하던 남자가 미리 와서 버티고 앉아 있었다. 그는 씩 웃었다. 흰 티셔츠를 입은 그의 육체가 터질 듯한 형광 빛으로 번뜩였고 동물의 것을 연상시키는 단단해 보이는 치아도 마찬가지였다. <블로뉴 숲의 여인들>을 봤을 때 나는 내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러한 동물성을 사랑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그만 가야겠어.” 자리에 앉지 않고 팔을 뻗어 가방을 집어드는데 남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내 옷을 자신의 쪽으로 잡아당겼다. 안녕. 그가 손을 뻗어 내 성기를 비틀어 쥐었다. 짓누르는 손길에 목소리가 순간적으로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는 모르는 사람이다. 여기서 처음 봤다. 분명히 그랬다. 그러나 어떻게 이렇게 익숙할까. 천장에서 돌아가는 빛이 없어 이 안이 완전한 암흑이었다면 나는 병을 깨서 그의 목을 충동적으로 그어버렸을 것이다. 여기 온 것이 일말의 충동이듯 그가 S라고 생각하면서, S 라고... 불쾌한 실랑이. 그가 더 집요하게 힘을 가했다. 테이블 위의 유리컵들이 몇 개 굴러 떨어져도 누구 하나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무력에 빠지지 않기 위해 애썼다. 스무 살 이전에는 이런 상황에선 울음부터 나올 것 같았다. 한없이 나약해지고 얼굴이 창백해졌다. 여기선 다 이렇게 해. 남자가 다시 이를 드러내는 찰나 “좋아?” 김수영이 툭 말을 꺼냈다. 나는 도리질 쳤다. 내 바람을 읽은 것처럼 갑자기 클럽 내부의 불과 음악이 순간적으로 모두 멎었다. 남자는 힘의 우위가 즐거운지 나를 주무르며 웃었다. “싫으면 거절해.” 김수영은 쉽게 한 마디를 속삭이곤 그 자리를 먼저 벗어났다. 남자를 떨쳐내고 클럽 밖으로 나왔을 때는 인도와 차도 모두 한산했다. 더위가 끄름 하게 가라앉아 옅은 한기를 느꼈다. 어떤 다른 수단에 기대지 않고 오랫동안 걷고 싶었다. 오피스텔로 향하면서 오랜 최면에서 풀려난 것처럼 정신이 또렷해졌다. 방학이 시작되고부터 정확히 일주일에 두 번씩 새아버지의 집으로 갔다. 기숙사 생이 그렇게 하듯 정해진 날짜 이외에는 방문하지 않았다. 내가 떠난 후 어머니는 새로운 식물들을 많이 심었다. 한층 화려해진 정원을 지나가면서 나는 정원의 모든 나무들이 하늘을 덮을 만큼 키를 키우는 상상을 했다. 이 집을 타넘고 이 일대의 주택들을 모두 덮고, 그 안의 사람들은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차이도 다름도 없이 천천히 숲의 일부로 묻혀간다. 새아버지의 집에서 멀거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시간이 잘 갔다. 정주한의 부모는 유학생 아들의 즐거운 방학 여행계획을 짰다. 나를 일원으로 포함한 여행이었다. 댐에서 그런 사고를 일으켰음에도 내 손에 비행기 티켓이 쥐어졌다. 정주한과 나에게는 아무래도 서로 가장 친한 친구 꼬리표가 붙어있는 모양이었다. 프랑스 니스로 가는, 일주일의 여행. 정주한은 니스로 직접 오고 나는 김수영 과 동행했다. 우연히 비행기에서 옆자리에 앉은 여자가 쉴 새 없이 떠들었다. 새가 횃대에 앉아 떠드는 것처럼 스튜어디스에게 요구사항이 어찌나 많은지 입이 아프지 않을까 싶었다. 그녀는 여러 가지 요구는 대개 의미 없는 것들이었다. 김수영은 헛웃음을 몇 번 웃더니 이내 헤드폰을 끼고 잠을 청해버렸다. 미리 나와 있는 가이드를 따라 버스를 타고 니스로 향했다. 처음 보는 이국의 땅이었지만 나는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짐짝처럼 실려 갔다. 차라리 미술관이라도 많은 파리였다면 더 흥미가 생겼을까. 모나코와 인접한 니스는 환락가였다. 거리는 명품가게와 나이트클럽으로 번갈아 채워져 있었다. 백인들 틈을 지나 김수영 아버지 소유라는 별장으로 향했다. 별장은 해변 아주 가까이에 있었다. 도시 끝에 있는 바다는 에메랄드빛이었다. 별장 어느 위치에서 봐도 한 눈에 바다가 잘 내려다 보였다. 항구나 어장이 아닌 바다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비린내도 없는 무향의 바다가 보이는 별장에서 나는 정주한과 재회했다. 그러나 단둘만의 재회는 아니었다. 유학하는 곳에서부터 함께 온 일행이 그의 곁에 붙어 있었다. 요란한 반가움의 표시 한편에 나는 물러서 있었다. 그는 나를 제외한 다른 이들과 바쁘게 인사를 나누고 전처럼 웃었다. 눈인사도 말 한 마디도 먼저 건네지 않는 정주한 앞에서 나는 다시 시간이 거꾸로 돌아간 느낌을 받았다. 그와 내가 서로 얼굴만을 알았던 때로... 정주한이 휴가 동안 어떤 행동을 취하든 상처받지 않기로 했다. 그의 감정이 변했다면 내가 댐에서 뛰어내린 이유가 가장 클 테니까. 그는 떠나기 전 백화점에서 마주쳤을 때보다 훨씬 건강해 보였다. 그것으로 족했다. 또래끼리 모여서 보내는 휴가는 그들의 익숙한 즐거움이었다. 그들은 밤을 기다렸다. 내 몫으로 배정된 방에 들어가 어머니에게 안부 전화라도 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어머니는 새아버지와 또 다른 곳에서 환락을 즐기고 있을 것이 분명하니까.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희연이었다. 함께 나가자고 청하는 것을 거절했지만 그녀에게 그런 것은 통하지 않았다. 나는 악의없는 희연에게 약했다. “산책이라도 하자. 여기 좋은데 그러고 있으면 심심하잖아.” 그녀와 함께 책 몇 권을 챙겨들고 해변으로 나갔다. 백인들이 모래 위에 누워 살을 태우고 있었다. 살타는 냄새가 느껴질 듯 뜨거운 햇볕 아래서 모자도 선글라스도 쓰지 않은 것은 나 혼자였다. 여기 일주일이나 있어야 하다니... 바닷물은 푸르고 아름다웠다. 그 안으로 꺼져 들어가버리고 싶었다. “낯설지? 너는 다 모르는 애들이잖아.” “......” 자리를 깔고 누운 희연의 등에 선크림을 발라주는데 그녀가 샐샐 웃어댔다. “조금이라도 어울려봐. 승영이 빼고는 다 괜찮은 애들이야.” “승영이?” “흥. 아까부터 주한이 옆에 있는애 있잖아. 걘 싸가지 없어서 친해지려고 노력해도 안될지도 몰라. 나도 무지 싫어하거든.” 나는 희연의 토로하는 듯한 말투에 조금 웃었다. 정주한의 옆에 착 붙어 있던 여자 이름이 승영이었구나. 키가 크고 눈매가 날카로운 미인이었다. 평생 받아본 햇빛을 다 합친 것과 비슷한 양의 빛이 온 몸으로 쏟아졌다. 흰 책 위에 쓰인 글씨가 모두 번져 희게 뒤섞였다. 백지를 읽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나는 읽는 것을 포기하고 눈을 감고 모래 장난을 했다. 손톱 밑으로 그리고 손금 사이에 끼어드는 모래들이 까칠했다. 너는 혼자야. 그 모래는 말하고 있었다. 해변에서 돌아왔을 때는 유리창 전면에 붉은 기운이 번져 있었다. 조금 이른 시간에 시작된 저녁 식사 시간은 길었다. 시간 내내 나는 술병 근처로 움직였다. 처음 왔을때 만큼은 아니었지만 정주한은 한 번도 내 쪽을 보지 않고 자기 친구들하고만 어울렸다. 나는 여기 왜 왔을까. 의무방어전이 어서 지나갔으면 했다. 희연은 먼저 파리로 간다고 했다. 식사만 마치고 짧은 인사를 남기고 떠났다. 그녀가 가고 난 뒤 처음 보는 주한의 유학생 친구와 김수영 간의 짧은 언쟁이 있었다. 그만 듣고 싶어 방으로 먼저 올라가려는데 유학생이 제지했다. “어딜 벌써 올라가? 내 얘기 아직 안 끝났어. 아무도 못 나가. 너도 입 있으면 지껄여봐.” 그는 벌써 취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무례를 서슴지 않았다. 모두 그것을 재미로 받아들였다. 어디가 재밌는 구석인지 좀 알고 싶다 는 말이 절로 나올 만큼 불쾌했다. 여자들 앞에서도 거리낌없는 음담패설은 김중규를 연상시켰다. 비행기를 타고 올 때도 그랬지만 나는 여기서도 의자에 온몸이 묶여있는 것 같았다. “어디서 저런 멍청한 새끼를 데려왔어.” 김수영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정주한 김수영과 고등학교 동창, 그들에게는 완전한 이방인인 나에 대한 심문이 이어졌다. 대답하기 곤란할 만한 질문들만 툭툭 튀어나왔다. 이미 서로 알만큼 아는 사이기 때문에 불순물처럼 섞여 있는 내 존재가 더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이 상태에서 채찍이라도 휘두르면 꼼짝없이 온몸에 핏물이 튀기도록 상처입고 나뒹굴어질 것이다. 사태가 점점 악화되는데 아무도 제지하지 않고 말려주지 않았다. 마치 이런 요란한 시간엔 한 마리의 희생양이 필요하고 그게 너라는 것처럼. 한바탕 소란 끝에 유학생이 배를 드러내고 바닥에 길게 누웠다. 쇼가 끝나자 여자들도 웃음을 뚝 그쳤다. 그리고 으레 익숙하게 그를 질질 끌고 계단 위로 사라졌다. 그는 배를 드러내고 눕기 전, 먹던 술잔을 내 어깨에 쏟았다. 어깨가 피에 번진 것처럼 포도주로 축축했다. 하루종일 한 번도 눈을 마주치지 않았던 정주한은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고 나서야 나와 눈을 맞췄다. 백화점에서 우연히 마주친 이후 육 개월만이었다. 희연과의 재회에선 그 시간이 체감되지 않았지만 그와는 달랐다. 낯설다. 그가 나를 향해 행동하지 않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그 어색함을 이기지 못하고 나는 밖으로 나갔다. 여름이긴 해도 그리 덥지 않은 날씨였다. 밤은 더욱 그랬다. 무작정 해변을 향해 걸었다. 걷는 방향이 틀렸는지 아까 희연과 갔던 에메랄드 빛깔 바다는 나오지 않고 외진 공터가 눈에 띄었다. 형광 빛 조명으로 장식된 놀이기구가 음울한 멜로디를 뿜으며 천천히 돌아가고 있었다. 한 시간 가량 혼자 돌아다니다가 별장으로 돌아왔다. 일 층은 나갈 때 어질러진 그대로였다. 내일 일하는 사람이 와서 치우도록 아무도 손대지 않았다. 몇 가지 커다란 쓰레기만 주워서 버렸다. 치워도 끝이 없을 것 같아 그만두고 방으로 들어서는데 침대에 누군가 버티고 앉아 있었다. 실루엣이지만 정주한임을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내가 침대 위에 두고 간 모래가 묻은 책을 의미 없이 손에 들고 있었다. 방 안에 그와 나 둘 뿐이었다. “미안. 방을 잘못 찾았어.” 가벼운 핑계를 대고 벗어나려고 했다. 그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내가 나가기 전에 제지했다. 제지할 뿐 입을 열지는 않았다. 내 눈은 그의 쇄골 언저리를 훑었다. 얼굴을 완전히 들기도 그렇다고 돌려버리기도 애매했다. “시차가 엉망이라 잠이 안와서... 그냥 좀 돌아다녔어.” 그의 매끈한 손으로부터 팔까지 쭉 이어진 푸른 정맥이 어둠 속에서 빛났다. 애완 동물에게 하듯 그는 아직도 짧게 유지하고 있는 내 머리카락을 쓸었다. “이 방이 좋아서 그런 거면 비켜줄게. 난 다른 방 가서 자도 괜찮아.” 핀트가 빗나가자 그는 툭 내 어깨를 밀었다. “자라.” 그는 별 다른 소리 없이 방에서 나갔다. 나는 침대 한 쪽에 걸터 앉아 눈을 비볐다. 비비고 또 비볐다. 고교시절을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들 투성이었다. 성장통이라고 해도 보통은 그렇게 아프게 지나지 않는다. 그들이 있었고 내가 있었다. 누가 누구에게 휩쓸렸던 것일까. 어느 순간부터 정주한의 얼굴은 항상 나를 쫓고 있었다. 처음에는 분노 그 후에는 욕정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는 차를 몰고 D시까지 내려오지 않았던가. 애정이 섞인다고 느껴질 무렵 그의 얼굴이 더 이상 내 쪽을 향하지 않도록 만들었다. 그를 두고 댐 속으로 뛰어내렸다. 나는 그가 열어두고 간 방문을 보았다. 아무것도 걸려있지 않은 복도의 흰 벽이 멀거니 보였다.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항상 내 메시지는 미리 결정되어 있었다. 아주 즐겁다, 이런 값비싼 여행에 초대해준 정주한의 부모님에게 감사한다, 그것이 전부라 통화는 짧았다. 어머니의 정원 나무는 좀 더 자라났을까. 새아버지의 집에 가면 사람들이 아니라 식물을 보러 가는 것이다. 더 단단하게 뿌리를 내렸을 땅을, 흙냄새를 파헤쳐 보면서. 그 식물들은 달라지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큰 위안을 주었다. 술 주정이 심했던 유학생 남자와 다른 일행은 먼저 돌아갔다. 별장에 최후까지 남은 것은 주한과 승영 김수영 나뿐이었다. 어차피 나는 다른 곳으로 갈 생각이 없지만, 승영은 불과 며칠이라도 니스 근처의 프랑스를 조금 더 둘러보고 싶어 주한을 조르는 기색이었다. “마음대로 해. 나는 상관없으니까.” 김수영은 그 말을 하며 넌지시 내 얼굴을 보았다. 두 사람이 어떤 사이인지 정확히 파악 되지 않았지만 정주한이 결코 나의 전부가 아니듯 그에게 있어 나 역시 전부가 아님은 확실했다. 간단히 생각하면 그가 내게 강아지를 주라고 김수영에게 말하고 있는 순간에 그의 곁에는 저 여자가 있는 셈이었다. 우리는 근처에 있는 샤갈 미술관과 테러 사건으로 죽은 사람들이 묻혀 있는 기념관에 갔다. 환락가 속에 묻혀 있는 장소들이었다. 전자는 김수영의 취향 후자는 정주한의 취향이었다. 푸른색 계통으로 그려진 미술품과 폭력에 잔인하게 희생당한 사람들의 적나라함이 오전과 오후에 번갈아 존재했다. 둘 다 얼얼할만큼 강렬했다. 정주한은 쉽게 여자에게 몇 개의 기념품을 사주었다. 다음날은 혼자 수영하러 갔다. 이번엔 내 취향의 놀이였다. 사람들이 조금 뜸한 바다 속으로 뛰어들었다. 입을 다물고 눈을 감고 귀를 막은 채로 물속에 잠수했다. 더 깊이 갈수록 그 생경한 느낌에 빠져들었다. 더 멀리 가려 할 때면 허기가 느껴졌다. 허기가 나를 세상에 묶어두는 끈이었다. 완전히 녹초가 될 때까지 놀다가 별장으로 돌아와 무방비 하게 침대에 누웠다. 다들 어디로 갔는지 별장 안은 아무도 없었다. 어디로 갔을까 미처 다 생각하기도 전에 잠에 빠졌다. “밥 먹으러 내려와.” 울림이 있는 목소리에 의식이 서서히 돌아왔다. 나는 허물을 벗듯 옷을 벗고 침대 위에서 죽은 것처럼 잠들었던 것을 기억해 냈다. 불을 껐지만 할로겐 불빛이 남아있었다. 그 아래로 떠다니고 있는 먼지들이 호흡을 따라 입과 코로 그대로 딸려 들어왔다. 정주한은 침대 한 쪽에 걸터앉아 내 어깨를 흔들었다. “아아.” 나는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의 손이 닿은 부분 뿐 아니라 닿지 않은 곳까지 온통 쓰라렸다. 옷을 집어 입으려고 했지만 옷에 살이 닿기만 해도 화끈거렸다. “너 살이 다 그을렸어. 혼자 얼마나 재밌게 놀았길래.” 그가 바닥에 떨어진 티셔츠를 집어주면서 손가락으로 어깨를 잡았다. “손대지마. 진짜 아파. 쓰라려.” 푹신한 침상, 잘 훈련받은 것처럼 내내 상을 차려내던 아랍계 가정부, 여름휴가. 그리고 밖에서 계속 냉랭하던 정주한과 그의 여자친구. 잠들기 전의 기억이 토막토막 돌아왔다. “... 기다려봐.” 그는 잠깐 나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크림 형태로 된 연고였다. “수영하기 전에 바르는 게 가장 좋지만 일단 발라두면 덜 아플거야.” “......” 냉장고 안에 있던 것처럼 연고가 차가웠다. 허공에 띄워진 그는 손이 조심스럽게 약을 발랐다. “... 티켓을 보내도 여기 안 올 줄 알았어. 항상 환멸이 인다고 했으니까.” 환멸이라는 단어를 말하다니, 그것은 내가 그에게 가르친 것이나 다름없었다. 등과 가슴팍에 바르던 약이 주르륵 아래까지 흘러내렸다. 약을 타고 그의 손이 골반까지 미끄러져 내려왔다. “장난 하지마.” “알았어.” 가까이 있는 그의 페니스를 쥐어보면 발기해있을 것 같았다. 그의 손의 움직임에서도 엷은 흥분이 느껴질 정도니까. “보고 싶었어.” 보고 싶다는 말은 함께 자고 싶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좀 더 직설적이었으면 좋겠다. 확실히 거절하거나 긍정할 수 있도록. 그것은 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시는 그런 짓 하지마.” 조금만 눈치가 느려도 좋을 텐데. 나는 그런 짓이 댐에서 뛰어내린 짓임을 한 번에 알아들었다. 쓰라린 부분을 일부로 공략할 때는 장난스럽더니 그의 얼굴은 어느새 매우 교훈적으로 돌변해 있었다. “미친 짓이었어.” “... 그래. 그래서 병원에 갔었지.” 그는 순간적으로 씁쓸한 얼굴이 되었다. 초대되어서 이런 말이나 하는 손님이라면 무례한 유학생남자와 다를 바가 없었다. 한 대 맞아도 할 말은 없었다. “......” “기분이 이상해. 새로 시작하는 거 같아.” 약이 묻는 것을 상관치 않고 옷을 입으려는데 그가 못하게 했다. 머리에 반쯤 티셔츠가 끼워진 채로 그가 내 팔을 잡았다. 그냥 그대로 있어. 그는 인두로 지져진 것처럼 붉게 그을은 내 피부에 손을 댔다. 아파 정말로. 손바닥도 내 살도 뜨거웠다. 아무런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댐에서 건져 올려진 내 이마를, 피가 멎도록 두개골이 뻐개지도록 눌렀을 그 손이 다시 내 몸 위로 올라왔다. 여기서 그의 성기를 빨거나 섹스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다른 사람들 앞에서 냉랭한 태도를 보이다가 둘만 남겨지면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을 전복시켜버리고 싶은 욕구도 일었다. 그는 네가 좋아 라는 표정을 하고 있으니까. 어느 정도 악랄한 마음을 품는데 그가 좀 더 얼굴을 가까이했다. 내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은혁아.” 언젠가 김수영이 학교를 벗어나면서 건네주었던 담배에서 나던 좋은 향이 났다. 자신도 체감하지 못하는 사이에 흡수하고 싶어지는 그런 향. 가난한 사람들에게선 이런 냄새가 나지 않았다. 그들의 집에선 독한 특유의 냄새가 묻어난다. 잔디와 도서관 선반에 흩어져 있곤 했던 종이조각들. 그 붉은 직선과 곡선들이 말하던 단어를 이제야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그 단어는... “야!” 입술이 닿을려는 찰나 방문이 열렸다. 정주한은 당황한 기색을 숨기면서 자신의 이름이 불린 쪽으로 몸을 돌렸다. 나는 침대 반대편으로 힘없이 떨어뜨려졌다. 내내 옆에 붙어 있던 그의 그림자가 여기까지 들어왔다. 해가 거둬지는 시간이라 잠시 사라진 줄 알았지만 여전했다. “아래층에서 기다리는데 여기서 뭐해?” “아무것도 아니야. 친구가 좀 아프다고 해서...” “어디가 아파? 약 서랍 있던데 해열제 먹어.” 열이 난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진단에 처방까지 일방적 반말로 지껄이며 그녀는 그를 데리고 방에서 나갔다. 방을 나가면서 그는 약이 묻은 손을 옷에 아무렇게나 슥슥 닦아버렸다. 언제라도 누가 데리러오든 그는 방을 나갈 것이다. 타인들 앞에선 한 번도 나를 인정한 적이 없으니까. 은밀하게 키워지는 식물, 철저히 은닉되는 것에 지쳐있는 나에게 이런 관계는 무리였다. 은닉되면 점차 망가지고 잊히게 마련이었다. 휴가는 빠르게 지나갔다. 내일이면 파리로 자리를 옮겨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다시 도시로 돌아가야 했다. 정주한과 그녀는 미국으로 나와 김수영은 남은 방학 속으로 돌아갈 것이다. 마지막 날 기념으로 클럽이라도 가자고 했던 승영의 계획은 실패했다. 일주일 내내 하루도 그렇지 않았는데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날이 흐리고 물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시계가 없으면 정확한 시간을 가늠할 수 없었다. 그녀는 신경안정제를 챙겨 먹고는 일찍 자러 간다며 올라가 버렸다. 일 층에는 세 사람만이 남았다. 김수영은 손짓으로 우리를 모두 불러올렸다. 이곳으로 놀러와 가장 말을 적게 한 사람은 김수영이었다. 그는 해도 거의 쬐지 않고, 자기 아버지 소유의 별장인데도 이방인처럼 굴었다. 정주한과의 유대관계가 아니었다면 갑자기 돌아가 버리거나 사라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김수영이 자는 이층의 방은 내가 머무는 방과 구조가 똑같았지만 가구 배치가 달랐다. 일상적인 가구는 침대가 유일했다. 나머지 벽면은 생소한 디자인의 장식장이 채우고 있었다. 인테리어를 최소화한 대신 장식품들로 꾸며 놓은 방이었다. 그는 침대 밑에서 나무 상자 하나를 꺼내더니 담배와 비슷하게 생긴 것을 꺼냈다. “바늘 없는 환각.” “이런 거 해도 돼?” “약한 거야.” 그는 우리에게 공평하게 건네주었다. 혼자 홀연히 사라질 때마다 그는 이 방에서 혼자 이것을 피웠을까. 니스 이곳저곳에서 산 팜플렛과 기념품들이 바닥에 널려 있었다. 그가 먼저 입에 물고 누웠다. 연기가 천장을 향해 서서히 손을 뻗고 올라갔다. 정주한 또한 익숙하게 받아 물고 김수영의 옆에 누웠다. 나는 받아든 것을 피우며 더블베드 끝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무게 때문에 셋 사람 중 하나라도 미세하게 움직이면 침대 스프링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에어컨을 켜도 습기가 심해서 더웠다. 연기까지 피워올리고 있으니 더욱 그랬다. 종래에는 세 사람 다 웃옷을 벗고 나란히 침대 위에 누웠다. 이런 관계가 꼭 친밀함이라고는 지칭할 수 없지만 며칠 간 함께 여행지를 헤매다니지 않았다면 이렇게 나란히 누울 일은 없었을 것이다. “아 기분 좋아.” 종강 날 클럽에서처럼 김수영이 긴 여운을 남기며 말했다. “이걸 하면 항상 속죄하는 마음이 되곤 한단 말이야.” “그럼 그동안 혼자 방에 처박혀서 반성하고 있었던 거냐.” “항상 반성하지는 않아. 대개는 떠올렸다가 지워버리거든.”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알기나 해?” “글쎄.” 여기 이렇게 평안히 누워 환각을 즐기는 것이 어떤 사람들 입장에서는 죄일 수도 있었다. 휴가 내내 정주한의 유학생 일원들이 함부로 대하곤 하던 고용인들이나, 매표소 직원들, 그리고 어느 땅에서건 비루한 생명을 이어가고 있을 모든 사람들에겐. 그리고 그들이 괴롭혀 왔고 앞으로도 무심하게 괴롭혀갈 사람들에게는 더욱... 나는 내가 밟고 서있는 금이 점점 뚜렷하게 나를 독촉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 새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좀 더 잘 보인다면 나도 김수영이나 정주한 같은 이런 삶을 항상 누릴 수도 있었다. 금 뒤로 물러선다면 D시의 삶으로 매몰된다. 경계에 서서 이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간 몸이 두 개 혹은 수십 개로 잘리지 않을까. “삶 자체가 죄였어. 예전에 읽은 고문서에는 이런 대사가 나오지. 네 삶 자체가 죄였어.” “고문서가 아냐. 나온 지 이십년 밖에 되지 않은 책이잖아.” 나는 중얼거렸다. 그 책은 내게 있어 항상 살아있었다. "그 구절이 난 우스웠어. 전반부엔 난쟁이 일가 후반부엔 재벌가. 무슨 전반전 후반전도 아니고. 하지만 그 책의 문장력에 대해서는 긍정할 수 있지.” “책 좀 그만 읽어라.” “누구 나?” “둘 다. 둘 다 똑같아.” 그것은 내가 가장 좋아한 구절이기도 했다. 타인을 전혀 이해하지 않고 상처만 주며 무신경하게 살아온 사람에게 경종을 울리는 부분이었다. 그 구절을 김수영은 명백히 비웃고 있었다. 내용이 아니라 문장의 아름다움만을 취하면서... 이들과 함께 누워있으면서도 나는 이들을 온전히 좋아할 수가 없었다. 그들의 다정한 대화를 흘려 들으며 몸을 일으켰다. 이 방에 들어올 때부터 내 시선은 벽에 붙박여 있는 거대한 수납장으로 향했다. 허락도 얻지 않고 그 문을 열어 젖혔다. 안에 통유리가 끼워져 있고, 십여 개의 총들이 차례로 정리되어 있었다. 먼지와 혹시 있을지 모를 부식을 막기 위해 유리로 철저하게 막아둔 것이다. 눈앞에 있는 진짜 총, 그 아래로 동물 장식이 새겨져 있는 긴 칼도 있었다. 김수영은 유리를 열고 총을 꺼내는 나를 제지하지 않았다. 손에 조심스럽게 감겨드는 총은 분명 새것이 아니었다. 누군가를 향해 겨누어지고 발사된 흔적이 분명히 남아있었다. “사람들은 어떻게 끔찍한 걸 보고도 모른 척 하면서 살아가지?” 약한 환각 속에서 내가 조합해낸 말은 그게 다였다. 대 여섯 개의 단어가 그런 문장을 만들었다. 잘게 찢겨 있던 도서관의 조각들이 하나로 이어졌다. 그들은 총을 꺼내든 나를 향해 몸을 일으켰다. 잘 발달한 어깨뼈와 쇄골 그리고 반듯한 얼굴이 나를 향해 있었다. 총구를 그들을 향해 겨누다가 다시 나를 향해 겨눠 보았다. 애초 좋지 않게 시작된 관계는 아무리 폭을 좁힌다 한들 항상 폭발성을 내재하고 있었다.그것을 그들도 잘 알았다. “쏴.” 김수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기 어깨뼈를 과녁 삼아 맞추라는 시늉을 했다. “총알 안에 있어?” “몰라.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지.” “.......” 정주한은 내 이마를 지혈했던 손으로 자신의 턱을 궤고 있었다. 김수영은 상자에서 새로운 알약을 꺼내 입에 털어 넣었다. 총구 앞에서도, 그것이 그들의 소유이기 때문인지 일말의 두려움이 없었다. 모든 것은 변할 수도 없고 변하지도 않을 것이다. 눈을 꽉 감고 손을 한껏 쳐들어 방아쇠를 당겼다. 손가락의 떨림. 먼 곳에서부터 가슴에 파동을 일으키는 총성. 순간과 영원이라는 단어가 갈렸다. 학교 운동회에서 달리기를 할 때 앞을 똑바로 보고 빨리 달리라는 신호,선고였다. 내가 휴가 내내 헤엄쳐 가던 수평선이 점점 더 아득히 멀어졌다. 뭍에 내려섰다. <끝>